Article in Korean on Korea’s democratic tradition from the Joseon Dynasty (in Korean in Kukmin Ilbo newspaper

This article argues that there is much of the democratic tradition in Korea that can be traced back far beyond the democracy movement of the 1980s, back into the Joseon period of the 17th and 18th centuries. The argument may seem somewhat obscure to some, but I would argue that if we see democracy in terms of the balance of power, Korea has a powerful and old tradition that deserves to be treated seriously, and emulated around the world. The Korean model is particularly relevant for China today.

국민일보

2012년 4월 2일

이만열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한국역사에 살아있는 민주주의 전통”

“법과 제도로 통치해온 과정은 아시아 리더로서 갖춰야 할 이념적 바탕이다”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주제를 갖고 아시아 각국을 바라보면 긍정적인 변화와 더불어 부정적인 변화도 동시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거를 통해 최고 권력자를 선출하는 나라가 많아지는 현상은 긍정적이지만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시민들은 오히려 줄고 있다. 이런 현상은 현대 아시아에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민주주의 위기가 임박했다는 진단을 내리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민주주의의 위기를 예방하기 위해 시민들이 정책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선진적인 민주주의 제도와 운영 방식을 실제로 보여줄 수 있는 모범국가가 나온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한국도 그 중 하나다. 다만 한국이 그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거쳐야 할 절차가 있다.

무엇보다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현재 수준으로 발전된 배경과 연원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흔히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이 1980년대에 갑자기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고 하는데, 이런 식의 언급은 뭔가 부족한 설명이다. 중요한 것은 그 투쟁을 성공시킨 배경이다.

만일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으로 최고 통치자의 절대적 권력 행사를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존재를 든다면 조선시대와 고려시대, 그리고 3국시대에도 민주주의는 존재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의 경우는 중국 송나라 시기의 유교 사상을 국가적 지도 지침으로 수용했는데, 이 사상은 민주주의적 요소가 매우 강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북송은 과거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했고 왕안석이나 사마광과 같은 최고의 지식과 강인한 실천 의지를 갖춘 문인 선비들이 정부 운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황제는 절대적인 위상을 가지지 못했다. 황제와 관료 사이에 균형을 유지한 북송은 비록 선거 제도는 없었지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세계적인 모범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성종 때 최승로는 이 같은 유교 이념에 따라 나라를 다스릴 것을 국왕에게 제안했다. 최승로의 아이디어는 사실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각종 제도와 장치를 도입하자는 부분이 핵심이었다. 그러므로 이 건의는 파격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성종은 건의를 수용했다. 성종이 특출한 성군이라서 수용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대체로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수용을 강박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객관적일 것이다. 어떤 연유든 성종 이후 고려는 법과 제도에 따라 중요한 사안이 처리되는 나라라는 성격이 크게 강해졌다.

고구려 시기에는 다소 자극적인 사례에서 민주주의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고구려의국왕 28명 가운데 모본왕 등 3명이 신하에 의해 죽음을 당했는데 세가지 측면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최고위급 신하가 국왕 축출을 주도했고, 다음으로는 정변의 명분은 포악한 정치로 백성을 도탄에 빠트렸다는 주장이고, 마지막으로 거사 성공 이후 주동자는 스스로 국왕에 오르지 않고 왕실 혈통을 찾아 차기 국왕으로 옹립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국왕의 절대 권력에 신하들이 반기를 들고 정치의 핵심 목표를 백성의 안위에 두는 전통이 2000년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판단은 과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한국이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을 지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허황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외국인인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운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역할을 성공적이고 생산적으로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불편한 시행착오를 거쳐 수행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한국인이 선택하기에 달려 있다. 성공적인 과제 수행을 원한다면 한국은 수천 년 동안 존재해온 스스로의 민주주의 전통을 재발견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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