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의 위기

한국 교육의 위기

올해 들어 KAIST 학생의 4번째 자살 소식은 다시금 한국 교육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이는 단순히 시험과정이나 학생들이 소화해야 하는 엄청난 교과 학습량의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KAIST는 세계 대학순위에 있어 수직 상승으로 각종 언론의 주목을 받아 왔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인간적인 경험이나 정신적인 성장은 배제되어 왔다. 학교의 명성과 숫자에 불과한 대학 서열을 위해 학생들의 희생이 계속되어온 것이다. 학생들은 마치 품질 좋은 메모리칩이나 탄소나노튜브처럼 높은 효율로 ‘생산’되고 있다. 엄청난 스트레스 아래 높은 학점과 좋은 직업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른 채 학교 당국의 목표에 끌려갔다.

그들은 저항하기 어려운 힘과 경쟁해 왔으며, 이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절망만을 불러왔고, 급기야 자살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불렀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또래들과 경쟁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정작 경쟁하고 있었던 상대는 무어의 법칙이었다. 즉, 제조비용이 최소가 되는 한에서 그 밀도는 18개월마다 대략 2배의 비율로 증가해 왔고, 단기적으로 이 증가율이 올라가지 않더라도, 현상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어의 법칙에서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을 몰아가고 있는 그 힘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학생들의 사고가 컴퓨터의 요구에 의해 더욱 더 정렬될수록,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가치관의 형성이나 창의적인 사고 활동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부모들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미래까지도 안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어쩔 수 없이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이런 교육에 자녀들을 몰아넣는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변화 속도로 보아 10년 후에도 이러한 흐름이 계속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직업조차도 남아 있을지 의문이다. 이렇게 겉으로 보인 결과를 추구한 교육을 받은 세대가 10년 후 만나게 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다면 이는 더 큰 비극을 부를 수도 있다.

우리는 많은 대학들이 값비싼 연구기관, 행정업무를 위한 건물과 방대한 토목공사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10조 원이 넘는 돈을 예비비로 쌓아두고 있으면서 해마다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보이는 화려함이 보이지 않는 내적 충만함을 가리고 있다. 정작 삶에서 위기나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적인 지혜를 얻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절망만이 남는다. 이들 대학들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사막과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부합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사막과 같은 비인간적인 교육이 아닌 인간다운 학교가 필요하다. 우리는 인간의 본질과 철학, 문학 내지는 예술 등 학생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 줄 수 있는 커리큘럼에 투자해야 한다. 결국 교육이라는 것은 돈벌이가 목적이 아닌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있다. 우리가 만약 진정한 교육을 추구한다면 이렇게 많은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단지 시험을 통해서 학생들의 수업 이해능력을 다시 내뱉게 하는 것은 인간을 기계화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의 두뇌는 실리콘이 아닌 물과 탄소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기계와 경쟁할 수 없다. 그러한 잘못된 비교는 결국 비극만을 가져올 뿐이다. 더욱이 컴퓨터 엔지니어나 법률가로 양성된 학생들은 그들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직업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전례 없는 기술의 성장으로 인하여 10년 안에 그러한 직업들이 자동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법률회사가 자동화로 인하여 변호사를 해고하고 있다. 다음은 의사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회계사는 이미 정리 작업에 착수했다.

그렇다면 그러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잡지광고에서부터 정치인들의 토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적인 현상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분석도 해야 한다. 그리고 예술이나 다양한 문학적인 기초를 다져 더 나은 미래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적인’ 학교를 만드는 것이다. 과학이 더욱 발전할수록 이러한 발전이 사회나 환경에 미치는 함축성을 발 빠르게 평가, 대응하는 사람만이 남게 된다. 결국은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그런 사람들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교육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디지털 기술이 지나치게 발전을 해서 실재와 조작된 이미지를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진실을 확인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발전시켜온 기술로 어떻게 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보호할 수 있을까? 어떻게 미래 로봇과 컴퓨터를 인류에게 위협이 아닌 도움이 되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 미래 로봇과 바이오기술이 융합되기 시작하면 ‘인간’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는가? 고령화 사회에서 인간의 역할은 어떻게 정의될 것인가? 이런 질문을 고려해야 되고, 학생들 또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교육을 찾고 추구해야 한다.

이제 우리 인류에게 있어 기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는 당면한 과제다. 이에 답을 줄 수 있는 분야는 기계공학이나 생명공학이 아니다. 바로 미학, 철학, 문학 그리고 예술분야에 있다. 우리는 전체적으로 교육의 목적과, 과연 교육이 어떻게 학생들의 미래에 부합할 수 있는지를 다시 고려해봐야 한다. 이는 어느 특정 분야의 직업이 옳은 길이라고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하고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그들이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길러주어야 한다. 교육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것에서 출발하고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만약 나의 아들이 35살이 되었을 때, 그동안 공부해 쌓아온 디자인 능력이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컴퓨터로 대체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불행히도 그러한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 만약 내 아들이 그 시대의 문화와 아이디어를 창조할 수 있는 시인이나 화가가 된다면 이러한 위기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와 그 가능성에 대해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기술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인력으로 수습불가능한 문제가 발생하거나 기술이 사람들에게 오히려 해가 되는 일들이 생길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사회의 엘리트들이 많은 비용을 들여 친환경 기술개발에 힘쓰고 있는 것을 본다. 하지만 쓰레기를 줄인다던지, 음식과 에너지 소모를 줄이는 등 환경에 정작 도움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모순적인 현상도 결국 그들이 받은 편협한 교육으로 인한 근시안적인 사고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리더십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막연히 리더십을 최고경영자들이나 갖추어야 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청소년에게 비춰지고 있는 최고경영자들의 모습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보통은 옷을 멋지게 입고, 회의에서 훌륭한 프레젠테이션을 자신 있게 하며, 자신들의 일을 열심히 하는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리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사람이 리더로서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들이 리더는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 또한 타인들이 만들어 놓은 모습을 추종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리더는 당연히 교육을 통해서 양성되어야 한다. 진정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이라도 도덕성으로 무장하고 용기와 상상력을 겸비한 사람들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대학들은 얼마나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는지 스스로 진지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것으로부터 진정한 교육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다.

지금의 리더라고 말하는 사람은 경제, 정치적인 지위에 지나지 않는다. 지위에서 우위에 있다고 해서 리더는 아니다. 정치에 대해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리더로서 지도자보다는 기적을 이뤄줄 사람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적의 정치인을 통해 세상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결코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사람들 사이의 새로운 시스템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리드하는 지도자 말이다. 이를 위해 우리에겐 미래를 준비하며 함께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선생이 되어 자신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당장에 주어진 과제도 있다.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한국교육이 직면한 또 하나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 고령화 사회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 뿐 아니라 세계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급속한 고령화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정도의 속도라면 아마 대학교 교육을 위한 재원의 상당 부분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쏟아 부어야 할 것이다. 향후 20년간 한국의 60세 이상 인구비율은 가파르게 증가할 것이며, 정부와 사회의 노년층에 대한 부양 비용이 늘어날수록 이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부담도 더욱 늘어날 것이다.

결국 2050년이 되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것이다. 2050년에는 40퍼센트 인구가 65세 이상이 될 것이며, 현재의 대학 졸업생들이 40세가 되는 2030년에 이미 25퍼센트의 인구가 65세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 결과 청년층의 교육에 대한 지원보다 노년층의 건강을 돌보는데 요구되는 지출이 더 많은 사회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재정 지출이 학교보다는 노인들을 위한 병원과 부양에 쓰일 것이란 사실이다. 교육계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청년층을 교육시키는 프로그램 개발에 쓰여야 할 예산이 노년층을 위한 평생교육프로그램에 더 많이 집행해야 하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우리는 고령화에 의한 노년층의 요구에 부합하기보다는 젊은 세대들이 그들 자신의 발전을 위해 필요로 하는 교육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이미 한국보다 먼저 고령화 사회가 되어버린 일본에서는 어떠한가? 벌써부터 사회나 정부가 그들을 제대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이유로 스스로 체념해 버리는 젊은이들이 생기고 있다.

오늘날 컴퓨터 기반의 교육이 야기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우려할만한 점이 있다. 이는 바로 현실세계를 평면적이고 단순한, 저해상도의 가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세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예측 또한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과학’은 현실세계를 숫자나 그래픽 등으로 해석하는데, 이러한 해석이 우리로 하여금 자연과 우주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인간 게놈을 단지 테라바이트의 특정 정보로 표현한다면, 학생들은 단지 그것이 전부라고 믿어버린다. 다시 말해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생명 현상이나 유전 현상의 참 뜻을 놓치게 하는 오류를 범하게 할 수 있다. 인간 게놈 유전자 코드의 데이터화는 ‘이해’의 한 과정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실제적인 적용을 하기에는 아직까지는 큰 한계가 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컴퓨터로 표현된 것이 액면 그대로라는 위험한 시각을 주입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한없이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전자나 DNA의 성질도 인간의 분석을 끊임없이 원점으로 되돌려 놓기도 한다. 우리는 아직 이러한 현상들의 극히 일부만을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궁극적으로 교육은 ‘사실을 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컴퓨터의 작업처럼 학습에 있어서 가장 단순하고 표피적인 것이다. 교육은 세계를 인식하며, 모든 세상의 현상에 대해 결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교육은 개별 사실을 모으고 모든 현상에 대해 그 뒤에서 작용하는 시스템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 속에 있으면 기후와 지질, 나무, 동물들이 어떻게 서로 간의 조화를 이루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들 사이에 있다면 도시의 하수나 전기, 물류, 물류, 생산과 소비 시스템을 전체로서 파악하고 자신이 새로이 습득할 지식을 전체적인 그 운영 시스템에 붙여놓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해 이해하고, 필요하다면 새로운 학문이라도 기꺼이 배울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새로운 생각과 그 흐름을 수용해야 한다.

 

 

이만열 Emanuel Pastreich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epastreich@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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