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을 둘러싼 ‘中日 분쟁’의 역사적 고찰” (인사이트 2014년 5월 30일)

인사이트

“섬을 둘러싼 ‘中日 분쟁’의 역사적 고찰”

2014년 5월 30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조어도열도(釣魚島列島)/센카쿠열도와역사

15 세기에 유럽에서 시작되어서 전 세계적으로 확장된 급진적 팽창주의의 전통을 일본이 답습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은 그러한 전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중국 역시 다른 국가와 민족을 향한 무력의 역사를 주기적으로 행해왔다는 것을 그들의 역사에서 확실히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본성의 하나로서 그리 놀라울 일이 아니라고 본다.비록 남중국해에 많은 섬들이 영토분쟁의 긴장상태에 있긴 하지만, 이해하기 쉬운 예로서 그 지역 긴장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는 조어도열도[釣魚島列島](또는 센카쿠 열도)에 집중해보기로 하겠다.

내가 조어도열도[釣魚島列島](또는 센카쿠 열도)에 관해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이나 대한민국이 일본이나 다른 나라들과의 사이에 가지고 있는 분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조어도열도[釣魚島列島](또는 센카쿠 열도)에 대한 논란은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섬들은 중국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기억과 중국의 영토 보전에 대해 일본이 묵살하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그러한 기억들은, 가족을 통해 전해졌든지 아니면 책이나 영화를 통해 배웠던지 간에 일본의 행동에 중국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에 계속해서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발생하고 있는 사건이 그저 역사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하며, 아마 심지어 오해의 소지까지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 최근 들어 심각한 도서[島嶼]분쟁을 발생하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조어도열도[釣魚島列島](또는 센카쿠 열도)는 오키나와, 대만과 중국 본토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위치는 대만과 오키나와의 양쪽 모두에게 잠재적으로 쟁점이 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대만은 네덜란드, 포르투갈,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 된 적이 있으며, 명나라의 망명정부의 도피지역, 여러 해적 구성원들의 거주지역이었으며, 현재는 중화민국 망명 정부가 자리하고 있다.  오키나와 군도는 일본과 중국 양국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하와이와 유사한 류큐 왕국으로서 알려져 있었다.

오키나와는 어부들과 상인들이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자유롭게 넘나들며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무역에 종사하던 비교적 개방된 나라였다.

만약 당신이 18세기의 오키나와에서 언제 중국의 통치가 끝나고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그것은 선을 그어서 구분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큐슈에 가까이 갈수록 일본문화에 근접했고, 대만에 가까이 갈수록 중국문화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류큐 왕국은 중국의 것도 아니고 일본의 것도 아닌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류큐는 무엇보다도 교량역할을 했다. 류큐왕국이 보여주던 국경의 개방 시스템은 일본 경제가 현대화되면서 쉽게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1867년의 메이지의 부활후의 시기에 현대국가의 건설은 민족국가의 엄격한 정의, 또한 경제적, 정치적 개발을 위해 식민지 국가들의 명확한 국경을 요구하게 되었다.

‘류큐’는 일본어로 ‘오키나와’라고 개명되었으며, 1872년에 “센카쿠”에 대응하는 일본의 첫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1879년에는 아예 일본으로 편입시켜버렸다. 비록 미국이 제 2 차 세계 대전 이후 오키나와를 점령하지만, 일본을 정복한 이후 정확히1972 년에 일본에 섬을 반환했다. 우리는 19 세기 인간 사회의 모든 엄청난 변화의 맥락에서 류큐 제도의 인수합병을 살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비록 그 변화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변화의 일부는 18세기 영국에서 ‘공유지의 사유지화 운동(the enclosure acts)’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공유지의 사유지화 법령(the enclosure acts)’은 토지의 본질을 재정립하기 위한 법률적인 활동이었다. 그것은 영국에서 그리고 유럽 전역에 걸쳐, 절대적으로 개인 또는 법인 에 속하는 땅 즉, 현대적인 “부동산” 개념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했다.

유럽 의 봉건사회에는 전통적으로 “공유지”가 존재해왔다. 이 공유지는 지역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넓게는 그들의 동물을 방목 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토지였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토지는 봉건영주의 상징적인 통제하에 봉토의 일부였지만, 사람들에게 인정되는 관행은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영주와 평민 사이의 관계는 공생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대변혁’이 발생했다.

그 사건은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저서 ‘우리시대의 정치와 경제의 기원: 변혁(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영주들은 공유지가 “부동산” 이라고 믿게 되었으며, 그들은 절대적으로 가난한 농부들이 수세기 동안 토지를 공유해 온 관습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용할 권리가 없으며 토지가 영주들에게 속해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례적으로 갑작스럽게 ‘내 것’이 된 매우 구체적인 장소, 절대적인 구분의 가장자리로서 토지를 보았다. 그저 토지를 이용하기만 했던 가난한 농부들은 더 이상 토지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토지를 ‘둘러싸기’위하여 울타리를 둘렀다. 유럽 사회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바뀌었다.

그 농민들의 일부는 길에서 구걸하는 걸인이 되었고, 결국은 농부들 중 많은 사람들이 19 세기의 경제에 변화를 가져온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토지가 가진 의미에 대한 이러한 변화는 농지보다 더욱 엄청난 영향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소비 생산품, 상품에 모든 개체의 급속한 변화의 시작이었고 현재까지 끊임없이 성장해오고 있는 소비문화의 시작점이 된 것이었다.

생각의 혁명은 세상의 어떤 물건이든지 재화로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이 되게 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토지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사회 경제적 맥락에서 일본의 오키나와 합병과, 차후에 따르는 조어도열도[釣魚島列島](또는 센카쿠 열도)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며, 이 현대적인 사고(思考)가 어떻게 아시아를 변화시켰는지, 그리고 작은 영토가 꼭 누군가에게 속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국경의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변화시켰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히 그것이 문제였다.

현재 미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전 유럽인들의 정착전에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고 있었던 미국원주민인 인디언들에게, 또는 하와이나 류큐의 주민들에게, 이러한 “부동산”의 현대적인 개념과 국경은 꽤 낯선 것이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태양이나 달이 자신에게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했다. 물론 누군가가 전통에 근거한 그리고 사용을 기반으로 한 권리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여기서 일본이 오키나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오키나와는 특수한 지역이며 그 토지와, 자원과 주민까지 어떤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일본이 소유하고 있다고 밝히는 법적인 문서가 작성되었다.

국경이라는 바로 그 개념은 근본적으로 19 세기의 경제 변화와 함께 바뀌었다. 우리는 사회의 현대적인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또한 국경과 경계선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국경의 개념에 대한 유연성이 훨씬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즉, 원래의 국경은 나라 와 나라 사이 문화권 과 문화권 사이에 있는 잠정적인 경계였다.

옛날 국경은 빈틈이 있는 유연한 경계선이었으며, 자유롭게 사람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근대화라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절대적인 수학적, 기하학적인 시각으로 “국경”을 취급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국경은 다른 국가가 침범할 수 없는 유연성 없는 고유영역이 되게 되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일본의 영역과 영토의 물리적 의미에서의 국경은 국가의 생존을 위한 아니면, 적어도 일본이 그 상황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의 성공은 본질적으로 상황과 토지에 관한 개념에 대해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재빨리 차용한 일본의 능력이었다.

평화로운 국민들로 구성된 류큐 왕국은 문화와 정치적인 면에서 중국과 일본 양쪽과 동맹을 맺고 있었으나, 느리게 일본으로부터 중국으로 문화양산의 중심점이 옮겨지고 있었다.

또한, 일본에게는 그런 애매한 상황을 지속할 여지는 더 이상 없었으며, 기존의 류큐 왕국을 더 이상 용인할 수 없었다. 오키나와와 홋카이도 양쪽 모든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새로운 관료체계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개인, 기업, 국가에 대해서 토지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밝힐 수 있는 새로운 법안이 정부에 의해 공표되었다.제 2차 세계대전의 전후기간에, 미국은 오키나와를 점령했고, 그 후 1969년에  일본에 오키나와를 반환하는 것에 합의했다. 센카쿠 제도의 “행정권(administrative rights )”이 일본에 이전된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미국은 1972년 일본에 이 지역의 인계를 준비하면서 분명하게 “통치권(sovereign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피했다.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음으로 인해, 이는 그 후에 센카쿠 제도에 모호한 상태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만들었다. 센카쿠 제도에 관한 “행정권(administrative rights)”이라는 어휘의 사용은 매우 조심스럽게 고려되었다. 혹자는“행정권(administrative rights)”, “통치권(sovereignty)”, ”소유권(ownership” 사이에 정확하게 어떤 차이점이 있냐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정확하게 한 섬이 국가에 속해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궁극적으로 그 국가는 누구에게 속해있는가? 지난 백년 동안 해상 경계의 복잡한 원칙은 토지와 다시 공유지의 사유지화 법령(the enclosures act)에 대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토지와 국경의 새로운 개념을 도출해내면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국제 법에 대한 새로운 규칙은 대체적으로 구체적이며 합법적인 것을 양쪽 다 인정하게 되었다.

해양법에 관한 유엔 협약은 거주민에 대한 자원의 소유와 법적인 규제가 ‘절대적인 선’에서 시작되고 정지된다는 것을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유클리드의 기하학(Euclid’s geometry)’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법에서 도출된 추상적 관념일 뿐이다.

확실하게 그러한 구분을 짓는 선은 영토분쟁이 발생했을 때 그들이 그 분쟁의 한가운데에 얽혀있더라도, 고래나 참치 같은 바다 속의 다양한 생물들이나 또는 바다를 생계수단으로 유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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