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험한 서울: 방문자에서 시민으로” (허핑턴포스트 2015년 4월 24일)

허핑턴포스트

“내가 경험한 서울: 방문자에서 시민으로”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2015년 4월 24일

 

내가 경험한 서울 | <1> 방문객에서 거주자로

 

내가 서울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91년 2월의 어느 흐린 날 오후였다. 기내 서비스로 제공된 치약처럼 생긴 튜브에 들어 있는 빨간색 매운 소스와 야채가 담긴 한 그릇의 밥이 날 당황스럽게 했다. 한국 사람들이 입고 있는 화려한 넥타이에 넓은 깃의 옷은 1970년대 어디선가 막 튀어 나온 것 같이 기묘했고 한국 여성들의 진한 눈 화장과 밝은 원색의 옷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착륙하는 비행기에서 내려 다 본 서울은 넓은 콘크리트 표면에 빠르게 나타나는 5층짜리 건물들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나는 일본의 거품 경기가 그 정점을 찍고 있던 시기에 도쿄에서 대학원생으로 4년간 생활했다. 당시 난 도쿄라는 도시가 갖고 있는 대도시의 생명력을 즐기고 있었다. 아오야모 길에 즐비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세련된 옷차림의 일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들의 새로운 세계적 영향력을 흥분된 목소리로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시 도쿄는 미국 내 어느 도시들보다 시각적으로 더 대담했고 커피는 더 맛있었으며 대화는 더 활기찼다.

상대적으로 난 서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동안 내가 서울에 대해 들은 이야기는 학생들이 머리에 빨간색 띠를 하고 거리에서 경찰과 싸우고 정치인들은 국회에서 서로 싸우는 도쿄보다 원시적이며 암울한 도시란 느낌을 받았다.

국가로서의 한국은 현대 국제 정치에서 각주로 가끔 언급되는 것이 다였다. 또한 “동아시아: 그 전통과 변화”라는 이름의 동아시아 연구 교과서(하버드 에드윈 라이셔, 앨버트 그레이그, 그리고 존 페이뱅크가 편집)에서 내가 배운 한국은 중국 문화가 아주 조금 변화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솔직히, 예일 동창생인 우이찬이 자신의 결혼식에 날 초대하지 않았다면 서울을 방문하기 위해 굳이 비행기를 타진 않았을 것이다. 우는 모든 사람과 잘 어울리는 최고의 친화력을 가진 미국 교포로 학부에서 일본어를 같이 공부한 친구이자 경쟁자였다. 그는 나보다 훨씬 큰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에서 일본어를 같이 공부하면서 늦은 시간까지 일본어를 연습하고 자주 같이 술을 마시곤 했다. 우는 연세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서울에 갔고 거기서 사려 깊은 한국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서울에 도착한 나를 환영해준 김포공항은 현대적 감각이 더해진 아시아 기능주의의 전형이었다. 타이페이, 자카르타와 쿠알라룸푸르 등 빠른 속도로 건설되는 아시아의 다른 대도시 내의 시설과 같았다. 급조된 김포 공항 터미널에는 과거의 농경사회를 뒤로하고 고급 잡지에서 보는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산업화된 미래를 만들겠다는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서울로 가기 위해 탄 셔틀버스는 갈매기 떼로 뒤덮인 거대한 쓰레기 더미를 지나갔다. 물론 내가 본 것과 같은 쓰레기 매립지는 도쿄에도, 그리고 뉴욕에도 존재할 것이다. 나는 고속도로 옆에 위치한 쓰레기 매립지 모습에 당황하면서 한편으론 요란하지도 꾸미지 않은 서울이란 도시에 조금씩 흥미가 느껴졌다.

서울에서 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도심 속에서 짐을 가득 실은 트럭 사이를 겁도 없이 요리조리 피해 운전하는 택시 속에서 난 나도 모르게 택시 앞 좌석 등받이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내가 받은 서울의 첫인상은 도쿄보다 조금은 더 거칠고 투박하며 무례한 듯했다. 당시 난 도쿄가 갖고 있는 우화함과 엄격한 품질 기준에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서울에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품질을 요구하는 도쿄에서는 본 적이 없는 콘크리트를 아무렇게나 부어 거칠게 만들어진 계단들이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보낸 3일 동안 난 표면 아래 존재하는 서울의 과소평가된 장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결혼식은 시청 근처에 위치한 웨스틴조선 호텔에서 열렸다. 이 현대적인 호텔은 일제 강점기 거리를 향해 서 있던 거대한 로마네스크 빌딩 출입구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주의 깊게 꾸며진 내부 장식 덕분에 과거의 유물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정말 추웠지만 다행히, 나는 혼자서 몇 시간 동안 주위를 돌아보고 거리를 구경할 수 있었다. 거리를 걸으며 서울 시민들이 낮은 철제 의자에 앉아 순대, (작은 조각의 떡이 매운 고추 국물 속에 잠겨있는 )떡볶이, (빵 가운데 검은 설탕이 들어 있는)호떡, (햄과 야채를 밥으로 싸고 그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김으로 싼) 김밥과 같은 음식을 먹고 있는 포장마차를 여러 개 지나쳤다.

서울의 공기에는 알 수 없는 설렘이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블라우스와 양말을 놓고 입씨름을 하는 재래시장에서 느낀 일종의 자유로운 생명력은 나를 점점 더 매료시켰다. 남북으로 나 있는 세종로의 양 쪽은 서울에서 가장 못생긴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대사관을 비롯하여 큰 콘크리트 건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서양식 건물 뒤에서 우연히 발견한 골목길에서 오래된 나무로 틀이 짜인 사각형의 흰색 석고 벽을 품은 한국 전통 가옥인 한옥을 만났다. 절제된 우아함과 세련된 비대칭 감각을 갖고 있는 한옥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금이 간 나무 대문 사이로 보이는 정원은 송나라 시대의 최고의 건축물과 같이 인간이 만든 구조와 자연 환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한국 정원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은 세심하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일본의 정원이나 분재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듯 한 외관에도 그 아름다움은 줄어들지 않았다.

몇 시간 자유롭게 서울을 구경하자 점점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도교의 미츠코시 이세탄 같은 대형 백화점 지하에는 식당가와 식료품 점이 있는데 여기서는 상사에게 새해 선물용으로 적당한 잘 길러진 멜론을 수백 달러에 판매한다. 난 한국의 롯데백화점 지하에서 일본과 비슷한 스타일의 식당가를 찾았다. 그 중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두와 템프라 스타일의 튀긴 고기와 야채를 주문하면서 기대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발견했다. 깔끔하게 회색 옷을 입고 머리는 단정하게 쪽을 지고 흰색 모자를 쓴 중년의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음식을 제공하는 동안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도쿄에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물론 나는 한국어를 몇 마디밖에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글 설명서를 훑어 보느라 바빴다. 3명의 아줌마들은(중년 여성) 나와 내가 하는 공부에 큰 관심을 보여주었다. 너무나도 정중한 톤으로 말하는 일본 여성들에게 익숙해 있던 내게 한국 아줌마들의 관심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들은 영어, 일본어, 한글을 비롯해 얼굴 표정, 그리고 단어를 썩어가며 내가 한국에 온 이유와 내가 하는 일에 진심으로 관심을 보였다. 아줌마들은 겉으로 보이는 내가 아닌 나란 인간에 관심이 있었다. 나는 서울이란 대도시 속에서 마을이나 작은 공동체에 존재하는 인간적인 따뜻함과 다른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을 발견한 것이다. 롯데호텔의 외관은 도쿄처럼 완벽하게 세련된 것은 아니지만 인내심을 갖고 내게 음식을 설명하는 아줌마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1970 년대 새마을 운동은 한국 전통 마을의 삶 대부분을 없애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마을이란 개념을 제거하기는 어렵다.

서울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정책적 지시에 따라 진정한 “건설 산업 단지”인 거대한 콘크리트 대도시로 변모했다. 서울이 파리나 비엔나와 같은 미적 매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뜰에 놓인 커다란 항아리에 김치를 담그는 여인 또는 단감을 끈에 메달아 처마 끝에 걸면서 자식들의 결혼이나 고등학교 시험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서 마을 공동체의 친밀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식당 아줌마들의 따뜻한 말에서, 택시 운전사가 보여준 관심에서 그리고 신문 헤드라인과 관련하여 호텔 웨이터가 보여준 동정심에서 서울이란 도시 표면 아래 존재하는 강력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호텔 내 작지만 절제된 품위를 품고 있는 마당에서 발견한 하늘로 젖혀진 3단 처마의 팔각정 원구단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원구단 모습은 중국 제국 후반의 정원 건축을 연상시키는 스타일이지만 덜 가식적이고 사색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 제단은 분명히 자금성에 있는 무언가를 단순히 본 따 만들었다기 보다는 서울의 급속한 현대화 속에 묻혀 있는 또 다른 한국 전통에 대한 단서였다.

원구단은 나의 고고학에 대한 흥미를 자극했다. 나는 원구단 옆에 서있는 청동 표지판의 건축물에 대한 간단한 영어 설명에 집중했다. 원구단이 1897년 고종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이며 한국의 황제로서 (무자비한 식민지 확장시기에 한국의 문화와 지정학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고종 스스로 지위를 황제로 승격시켰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종 황제는 고려 시대 때부터 시행되었던 하늘에 드리는 제사 의식의 재현을 통해 서울의 문화적 자신감을 회복시키고자 했다. 사실 이 의식은 1454년에서 1464년까지 조선 왕조 세조에 의해 짧게 재현된 바 있다. 이후 조선 왕조보다 24년 먼저 실시된 중국 명조의 문화적 권위를 받아들이면서 이후 중국에 조공을 받치게 되었다.

고종 황제는 누구이며 그는 왜 원구단 건설을 통해 왕국을 제국으로 변화시키려고 했을까? 19세기 말 고종의 아버지는 왜 1592년 일본 침략으로 불타 폐허가 된 서울 북쪽의 경복궁을 재건했을까? 나는 서울 속 궁궐들을 방문하면서 서울이 단순히 1970년대와 1980년대 (타이페이 또는 마닐라와 유사한) 급속한 발전의 산물이 아님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서울에는 일본의 에도 시기(현대도쿄)가 시작하기 훨씬 전인 1390년 처음 디자인된 걸작들이 싸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이 갖고 있는 이러한 심층구조는 아직까지도 살아있다.

경복궁 앞 광화문에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대로는 14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는데 궁 북쪽에 자리잡은 북악산 (북쪽에 있는 산봉우리)과 그 뒤의 삼각산의 (3개의 뿔이 있는 산) 기가 흐르는 통로 역할을 했다. 원구단을 본 이후 종로를 바라보며 난 서울이란 도시 표면 아래 묻혀있는 역사적 윤곽을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이 기의 흐름을 끊고 풍수적 순환을 방해하기 위해 광화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자만심에 가득 찬 조선총독부를 건설하였지만 서울이란 고대 도시가 갖고 있는 얼은 살아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길을 걸으며 아스팔트, 콘크리트, 철골, 그리고 유리에서 고대 수도가 갖고 있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울 시민들도 잘 모르는 서울 도로 중에는 10세기에 만들어진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울을 처음 방문하고 20년이 지나 2011년 난 관광객이 아닌 아이들이 한국 학교에 다니는 아저씨 (중년의 한국 남성)가 되어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침이면 콩나물 시루 같은 지하철로 출근하는 서울 시민이 되어 있었다. 나는 작은 도시였던 서울이 빠른 속도로 세계 문화, 교육, 금융 그리고 정치의 중심으로 진화하는 것을 목격했다. 서울의 변화는 미국에 있는 동료나 한국인 스스로도 그 변화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인스턴트 커피에 설탕을 많이 넣은 커피만 팔던 서울의 커피숍 (다방)들은 카페로 변모했고 아시아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커피를 판매하는 곳도 있다. 화랑이 도시 곳곳에 버섯처럼 솟아났다. 종종 화랑이 자리잡은 장소들은 첫 눈에는 별 재미가 없는 지역으로 과연 이런 곳에서 갤러리가 될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탁소와 식료품점 사이에 끼어 미묘하게 아이러니한 작품을 소개하는 화랑을 발견할 때마다 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난 서울 같은 도시를 본 적이 없다. 서울 어디선가는 세계적 수준의 낙서 예술을 만날 수 있고 암호 같은 상형 문자와 이미지가 그려진 작은 크기의 이상한 포스터(2 × 2 cm)가 여기 저기 나타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겉으로는 비슷하게 옷을 입은 직장인들과 20층 아파트에서 실질적으로 아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주부들이 보여주는 매우 획일적인 문화 아래에 활기 넘치는 창조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루한 교육 시스템이 창조한 상상력이 없는 직장인들과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자살 율에도 불구하고 서울 안에는 넘치는 창조력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창조적인 래퍼를 비롯하여 에너지 넘치는 댄서 그리고 혁신적인 클래식 음악가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단조로운 벽돌 건물과 한국의 생산품으로 유명한 반도체처럼 디자인된 서울의 고층 빌딩들 사이에서 어떻게 이처럼 동적인 문화를 만들어 내는지 모르겠다. 서울에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서울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외국인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도 서울이 얼마나 문화적으로 활력이 넘치는지 잘 모른다.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 서울의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만약 내가 10년 전 서울이 세계의 문화 중심지가 되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비웃었을 것이다.

물론 서울이 세계 문화의 중심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직은 이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서울은 놀라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년 전 한국에 일본 만화가 넘쳐날 때 정부는 일본 만화 수입을 제한해야 했다. 그러나 지난 5년간 서울은 급격히 늘어나는 웹툰 산업(인터넷 만화)의 메카로 떠오르면서 아시아에서 만화의 흐름을 바꾸고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고 있다. 웹툰의 발전은 한국에서 만화가 완전히 소외되었다고 여겨졌을 때 시작되었고 5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한국은 업계의 주요 국가로 떠올랐다. 젊은 바둑(일본에서는 “고”라고 함) 고수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겪는 한국 기업체 내의 일상의 진부함과 기업 문화 속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것 같은 직장인들의 인간관계를 다룬 웹둔 ‘미생’은 큰 인기를 얻었다. 미디어 거인인 다음을 통해 작품을 발표한 미생의 윤태호 작가는 서울에 웹툰 허브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미생을 내 개인 블로그인 “Circles and Squares,”에 소개했을 때도 블로그를 운영한 지난 5년 동안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히트를 받았다.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형태도 크게 변했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미군이거나, 선교사 또는 영어 교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미군 기지가 있는 이태원 근처를 주로 방문했다. 그러나 현재 서울에는 도시가 주는 기회를 찾아 세계 각지에서 온 작가, 예술가, 기업가, 그리고 과학자들이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이란 도시 표면 아래 존재하는 잠재력과, 서울의 문화적 유연성 그리고 그 생명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난 40년간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주로 미군 기지에서 멀지 않은 해방촌에 살았다. 그러나 군기지 자체가 평택시로 이전할 예정이어서 해방촌 인근에는 새로운 예술 카페와 유기농 채소를 원료로 한 수십 가지 막걸리 샘플을 맛 볼 수 있는 막걸리(한국의 전통 쌀 와인) 바를 포함하여 다양한 상점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 지역은 1980년대 하이트-애쉬버리와 매우 유사한 외국인 거주지가 되어가고 있다.

외국인 친구들은 서울 시민들의 편협함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들은 한국인들이 상투적으로 묻는 김치를 좋아하냐 또는 언제 본국으로 돌아가느냐와 같은 질문에 불편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편협함에 불평하는 만큼 한국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서울에는 숨겨진 보석들이 있다. 한국 켄트 외국인학교가 그 한 예다. 켄트 외국인학교는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을 위해 미국 학교 시스템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학교가 아니다. 이 학교는 의미 있는 교육을 위해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공부와 더불어 사회적 인식을 결합한 혁신적 개념의 학교이다. 켄트 외국인학교는 미국 학교보다 훨씬 독창적이며 조금 더 복잡한 문화적 진화를 제안하고 있다.

서울의 문화에선 흥분이 느껴진다. 친구 중에 서울에서 수년간 생활한 뉴질랜드에서 온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가족 문제로 뉴질랜드로 돌아갔지만 그가 서울에 살 때는 서울의 삶과 한국인들의 편협함에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그러나 뉴질랜드에 돌아가서는 한국으로 다시 올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를 묻는 이 메일을 수년간 내게 보내왔었다.

서울의 우수한 수도권 지하철은 펑크에서 우아한 스타일까지 많은 시간을 들여 치장한 어린 소녀들로 가득하다. 싸이나 소녀시대 노래에 맞추어 군무를 추는 청소년들을 볼 때면 저절로 눈길이 간다. 홍대 주변의 가판대를 놓고 직접 만든 옷을 팔고 있는 고등학생들을 보면 넘쳐흐르는 대중 문화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서울의 매력에는 음식과 패션뿐만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있다. 서울은 지금 지적, 제도적 의미에서 최고점에 도달해 있다. 나 자신의 연구 분야인 아시아 연구에 있어서도 서울만큼 일본, 중국, 한국 관련 연구를 하는 전문가들이 많은 도시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학, 엔지니어링, 생명과학 분야 전문가의 수도 세계의 다른 주요 도시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다.

서울이 뉴욕이나 런던보다 노벨상 수상자 수는 적을지 몰라도 반도체 웨이퍼 제조에서 암 치료, 슈퍼 컴퓨팅에 이르기 까지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과 지식을 갖고 있지만 다른 도시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보다 적은 연봉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서울이 갖고 있는 노하우는 높은 교육 수준과 서울시 공무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헌신과 민간 단체가 운영하는 다양한 복지, 교육, 문화 프로그램과 맞먹는다. 서울의 명성이 갑자기 높아진 데는 서울이 갖고 있는 다양한 전문 지식층이 한 몫을 하고 있다.

내 대학 동창들이 아는 한국은 우리가 어렸을 때 보았던 TV 시리즈 “M * A * S * H *”(이동 육군 외과 병원)를 통해서 얻은 것이다. “M A * S * H *”는 70 년대 제작된 당시 서울의 변두리였던 의정부에 위치한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떠버리 의사들을 다룬 시트콤 이다. 이 시리즈는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결과적으로 아시아 전체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M * A * S* H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미국 의사들로부터 아버지와 같은 관심을 필요로 하는 글을 읽지 못하는 농민들이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는 아직도 “M*A*S*H*” 에서 본 내용으로 각인되어 있다.

미국인들이 서울이 얼마나 복잡하고 세련된 도시로 변화했는지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미국이 한국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온정주의적’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인들도 정확한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한국 방문자에게 주어지는 전형적인 설명은 “한강의 기적”이다. 이 환상적인 이야기는 1960년대 초 한국의 일인당 국민 소득이 아이티, 에티오피아, 예멘보다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직업 윤리와 교육에 대한 헌신 그리고 서울을 북쪽(강북)과 남쪽(강남)으로 나누는 한강을 따라 이루어진 급속한 산업화 덕분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고 현재의 제조 강국의 위치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는 8세기부터 선진기술을 수출했고 14세기부터 서울이 갖고 있는 지식과 정치의 중심지로서 그 세련됨을 의도적으로 낮게 평가하고 있다. 이는 또한 관리 및 교육 속에 스며있는 한국의 전통적 가치와 한국의 다른 문화적 요소를 무시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서울의 가장 좋은 것들은 방문자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우리는 명동과 압구정의 화려한 백화점에 눈길이 빼앗기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 시민들이 단순히 어디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와이파이나, 현대식 고층 건물, 번개처럼 빠른 고속열차 KTX와 같은 현대적인 서울만을 외국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처럼 편리하고 최첨단의 서울 속에는 최고의 골목길과 갤러리, 그리고 또 다른 공간들이 숨겨져 있다. 많은 방문객들은 서울이 방콕, 오사카, 상하이 와 별로 다르지 않은 대도시라는 인상을 받고 떠난다.

서울에서 7년간 살아본 내 경험은 서울에는 다른 어떤 대도시에서도 찾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서울에는 싱가포르나, 타이페이, 홍콩, 방콕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의 소설가, 시인, 화가, 조각가, 영화 감독, 문학과 철학 교수, 낙서예술가, 랩 댄서, 펑크 밴드, 서예가, 유전학자들이 많다. 과거에는 도쿄에서 패션, 화장품, 음악과 춤 유행이 시작되어 아시아로 전파되었지만 지금은 서울이 문화 핵분열의 중심지로 문화를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나 도쿄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모방했지만 지금은 박찬욱 감독의 2003년도 클래식 ‘올드 보이’가 2013년 스파이크 리에 의해 미국 시나리오로 제작되고 있고 마찬가지로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2001)는 2008년 얀 사무엘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서울이 이처럼 문화적 활기를 띠게 하는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서울의 건축물들은 다른 문화 중심지, 심지어 상하이나 베이징과 비교해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평범한 한국사람들이 입는 옷이나 (물론 맛있기는 하지만) 먹는 음식과 같이 작은 범주로 본다면 특별히 창의적이지 않다. 그러나 삼성의 산업 디자인 품질은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있으며 강남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 또한 그렇다.

서울의 문화적 활력은 주로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과 사회적으로 중점을 두고 있는 교육적 관점에서 설명된다. 전자는 아마도 부와 급속한 성장을 위해 필요한 사회 기반 시설을 제공하였고 후자는 지적이며 문화적으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서울의 기본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앞의 설명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서울이란 도시가 갖고 있는 활력과 예측할 수 없는 환경적 성격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나는 아마도 서울이 갖고 있는 성격은 서울 속에 존재하는 모순과 긴장이 창조하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공동체, 경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개념간의 경쟁을 통해 독특한 문화 생태계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생태계는 종종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우중충한 3층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서울의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 보면 똑같은 모양의 식료품점과 세탁소를 지나고 가끔은 노래방과 국수 가게를 만나게 된다. 그러다 여기에 뜬금없이 아방가르한 갤러리나 눈에 확 띄는 손으로 그린 그림의 과일 좌판대가 눈을 즐겁게 한다.

2 responses to ““내가 경험한 서울: 방문자에서 시민으로” (허핑턴포스트 2015년 4월 24일)

  1. sukkyong shin April 24, 2015 at 5:48 pm

    아주 아주 깊이 있는 스토리 텔링..이만열교수님..감사합니다. 멋지네요..다시 한번 우리가 가진것이 얼마나 많은지 그림 그리듯..머릿속으로 그려봤어요..

  2. US JB Club April 24, 2015 at 7:17 pm

    매우 즐겁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뵙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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