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싱크탱크의 중심으로 거듭날 수 있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 2015년 09월 20일)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서울, 싱크탱크의 중심으로 거듭날 수 있다”

2015년 09월 20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

 

 

통치는 오늘날 아마도 가장 큰 위기상황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시민들에 게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관료와 기업고객들에 의해 운영되며, 그들은 미디어를 통 하여 정보를 전달하고 시민들로 하여금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게 하기보다는 그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말초적 즐거움을 제공하게끔 한다. 말 그대로, 오늘날의 통치에 서 시민들이 정책에 관하여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은 사라져 버렸으며, 많은 시민들은 쉽게 자신의 참정권을 포기한다.

이런 상황에서 싱크탱크는 양날의 칼이랄 수 있다. 형태로만 보면 시민들에게 정책을 위한 공론장을 열어주는 싱크탱크들은 분명 있다. 한국의 환경운동연합이나 참여연대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렇지만, 심지어 가장 진보적인 싱크탱크 집단조차도 때때로 영향력 있는 몇몇 인사들에 의하여 좌지우지되거나, 집단 외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또한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국제적 연대를 이루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보적 싱크탱크들은 전 세계에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집단을 두고도, 중국어나 일본어는 고사하고 영어로도 세미나를 하거나 연구보고서 같은 것을 내지 않는다.

이와 달리, 정책입안권을 지닌 이들에게 필요한 무수한 관련 책자를 발간하고 오 피니언 리더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여는 아산정책연구원 같은 공간은 매우 많다. 물론 아산정책연구원 같은 곳은 정책에 대한 논쟁보다는 우파 출신의 전문가들을 위한 기관이며, 이미 결정한 정치적 사안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곳이다. 이런 싱크 탱크들은 한정된 초대자로만 구성한 행사를 진행하며, 정부 요직의 고위 관료로 한정된 모임을 하면서 그러한 독점적 지위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싱크탱크들이 설령 정책에 관한 광범한 논의의 공론장으로 기회를 제공한다 해도 이 공론장에서 다루는 논의들은 대부분 관련 집단에 의한 합의의 장으로 기능할 뿐, 시민들의 의견을 더 넓게 수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싱크탱크란 소비자 문화의 확산 역시 넓게 반영하고 숙의한다. 이렇게 하여 제공한 아이디어를 재포장하거나, 때로는 그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라 하더라도 공중(公 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등의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보면 싱크탱크란 결국 새로운 정책 발단의 소스를 위장하는, 명백히 비민주적 기능을 한다. 또한 싱크탱크는 고도의 지적 훈련을 받은 정부 관리들이나 국립대학 교수들이 미리 결정한 사안들이 컨설턴트 기업이나 정책 논의에 통제 권한을 받은 외부 기관의 외주로 이뤄지는 형식을 갖추는 요즘의 대세와도 관련이 있다. 이런 이유로 정부나 기업 등에서 근무하는 개인의 참정권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업무 현장은 민주적 분위기에서 더욱더 멀어진다. 소위 말하는 전문가나 대기업, 정부기관의 은퇴자들에게 뇌물처럼 주어지는 이런 식의 컨설팅 문화가 확산되는 것은 의뭉스러운 싱크탱크 집단이 늘어난다는 뜻이며, 그런 기관에서 실무를 보는 이들의 주체적 활동을 저해한다는 뜻도 된다. 이는, 싱크탱크 집단이 전 세계적으로 정책 논의에서 대단히 중대한 공간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경향은 얼마간 바뀌지 않을 것을 함의한다. 거의 실현되거나 그렇게 인식되는 일은 없어도, 싱크탱크 집단은 공무원들이나 각종 민간 부문의 대변자들, 지역별 시민 집단, 전문가, 일반 시민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와 의견을 나누며 더 보편적이고 광범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정책 수립에 필요한 깊이 있는 논의의 장이 될 수 있다. 브루킹스 연구소나 헤리티지 재단과 같은 워싱턴 D.C.의 싱크탱크 집단은 지난 수십 년간 정책 논의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많은 글과 기사가 근자에 들어 한•중•일의 언론 지면에 실렸는데, 그 내용은 새로운 경제 주체 형성과 관련한 새로운 싱크탱크가 생겨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싱크탱크는 국가적 이익의 증진 ― 혹은 그렇게 생각되는 것들 ― 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서울시에서 상당수의 싱크탱크 집단을 양성하고 국경을 넘어 세계 정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최근 들어서다. 한국개발연구원이나 세종연구소 같은 기관은 정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국가 정책의 체계적인 논의 방안을 수립하는 역할을 한다. KDI는 개발도상국 의 경제성장을 위해 한국적 모델을 제시하는 업무 비중을 늘여가고 있다.

하지만 아산정책연구원과 동아시아연구원이 7년이 넘게 한국의 싱크탱크 집단에 가져온 것은 글로벌 임팩트였다. 특히 아산연구원은 서울과 워싱턴 D.C.에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이벤트를 위해 미국에서 고위직 인사들을 영입하는 데 주력 ― 실제로 그 이벤트들은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 했다. 아산연구원에서 개최한 행사에서 보인 우익적인 노선은 실상 한국 노동자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서울이 싱크탱크의 새로운 중심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한 가지 더 의미 있는 일이라면, 국제적인 싱크탱크 집단이 서울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아시아재단은 수십 년간 서울에서 이따금씩 연구보고서 같은 책자를 발간하거나 소규모 행사를 열었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한국이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 선진국 반열에 들면서 한반도에 대한 아시아재단의 관심사는 북한이 되었다. 최근 설립한 ‘아시아소사이어티’ 의 지부는 서울에서 더 많은 문화 행사가 열릴 가능 성을 넓혀주었다. 최근 들어 관련 사안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마도 외국인들이 서울에 ― 지부와 달리 ― 독립적으로 세운 싱크탱크 집단일 것이다. 한•중•일 3국 사이에서 주류의 싱크탱크 집단들이 간과한 기후 변화나 기술, 사회적 문제에 역점을 둔 아시아 연구원은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형성해왔다. 한국에서 출발한 이 기관은 아시아의 이슈에 초점을 맞추면서 국제적 인지도를 높여왔다. 비슷한 예로, 몇 해 전 미국인 이 서울에 아리랑연구원을 세웠다. 이 연구원은 남북통일에 관하여 국적을 막론하고 한국에 거주하는 이들이 함께 의견을 나누는 공론장 형성에 역점을 둔다. 아리랑연구원은 북한의 위협에 노골적으로 강경대응을 주장하는 데 익숙해진 한국인들에게, 미국에서 일군의 싱크탱크 집단이 제기한 사안들, 북한과의 문화 교류가 더 미래지향적임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이 기관은 한국 대학생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얻었고, 탈북자들이 북한의 정치 현안 논의에 참여한 첫 기관이기도 하다.

과연 서울은 거듭날 수 있을까

문제는 서울이 세계적 수준의 싱크탱크 집단을 보유한 도시로 거듭날 수 있는가다. 확실히 그러한 잠재력은 있다. 아시아연구원 같은 집단은 견실한 재원을 구축했으며, 서울에는 세계 어디보다 공론장에 참여할 수준 높은 청중들이 있다. 서울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전 지구적 경험을 지닌 전문가들을 찾을 수 있는 도시다. 아 마도 한국 기업의 활발한 비즈니스 덕일 것이다. 예컨대 다른 어떤 도시보다 서울은 한국어•중국어•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카자흐스탄의 사회 기반 시설에 대한 지식과 에티오피아에서의 사업 경험까지도 갖춘 그런 사람을 찾기가 쉬운 도시일 것이다. 게다가 젊은이들 가운데서도 중국어•한국어•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교육 수준이 높은 이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중국 관련 정책 현안 논의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매우 좋은 토양이 형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싱크탱크의 허브로 서울이 발돋움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한국인들이 서울의 위상을 잘 모른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하버드나 예일 대학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매우 잘 알고, 일본•영국•독일•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해 의욕적으로 알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이 지닌 놀라운 사회기반시설이 개발도상국들에게 얼마나 좋은 모범이 되는지, 축적된 제조업의 노하우, 전자 정부 구축을 위한 역량기반, 세계 수준의 연구기관과 대학기관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교육을 받은 많은 한국인은 자신의 나라가 선진국의 높은 사회 기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서울이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만들 수 있는 정책 현안보다는 그런 기준을 따라잡는 데 관심이 더 많다.

테크놀로지와 새로운 경제 동향의 흐름에서 앞서 나가기 위한 과감하고 극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물론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서울이 정치, 테크놀 로지, 범지구적 관계망과 관련된 싱크탱크의 놀라운 집합소로 반드시 거듭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되려면 선행돼야 할 조건이 몇 가지 있다. 그러한 조건은 예산이나 기술, 브랜드화 같은 것이 아니다. 물론 모종의 변화나 개선이 있을 수는 있으나, 앞에서 언급한 과감하고 극적인 변화를 위한 그런 기반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선행조건이란 그보다는 비전이나 획기적 역량에 있다. 정책에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새로운 싱크탱크는 기존의 다른 싱크탱크 집단을 벤치마킹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런 싱크탱크는 오로지 서울시에 그와 같은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비전과 혁신을 지지하는 문화가 안착되어야만 생길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서울의 차세대 싱크탱크 집단은 젊은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기존 집단에서 여는 세미나나 리셉션을 보면 참여자가 40세 미만인 예는 드물다. 싱크탱크 집단에서 나선 발언자들도 60~70대인 경우가 많다.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여는 행사에서 30대 미만 ― 심지어 40대 미만도 ― 을 만나더라도 십중팔구 인턴십 과정에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행사 조직에서 기껏해야 작은 역할을 맡는 정도다. 그들의 위치는 갈수록 급여도 그렇고, 정직원으로 채용될 보장조차 없이 착취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런 불행한 일들은 더는 일어나면 안 된다. 고등학생 이상의 젊은이들은 그런 행사나 리서치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할 수 있어야 하고,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그래야 한다. 젊은이들은 자신들만의 싱크탱크 집단을 만드는 기금 모금에서도 지금처럼 어려움을 겪지 않아야 하며, 그런 싱크탱크 집단을 통해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다듬어갈 수 있어야 한다. 젊은이들이 싱크탱크 집단에서 핵심 인력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만 그들이 ― 싱크탱크 집단 ― 다음 세대를 위한 제대로 된 수요를 파악하고 반영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이 직면한 고령화 사회는 중장년 이상 연령층의 관심사를 고려하느라 젊은이들의 입장이 간과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젊은이들을 소외시키는 이런 관점들은 사회적으로 심각한 불평등을 낳게 된다. 싱크탱크는 이런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옳다.

다음 세대의 싱크탱크는 모든 점에서 국제적인 면모를 띠어야 한다. ‘국제적’ 이란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서 많은 싱크탱크 집단이 실수를 저지른다. 전문 지식을 갖춘 엘리트 집단에만 유용한 영어로 진행하는 행사를 하거나, 미국에서 이따금씩 전문가를 데려온다고 해서 ‘국제적’ 인 것이 아님을 염두해야 한다.

한국의 싱크탱크 집단은 임시로 머무르는 직책이 아니라, 정규 수석연구원 자리에 외국인을 영입해 연구팀을 구성해야 한다. 또한 연구원의 최소 절반은 여성으로 채워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의 싱크탱크가 다문화적인 면모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문화 가정 출신의 연구원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미래이기에 그런 사람들이 싱크탱크 집단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다음 세대의 싱크탱크는 ― 문명 이상의 ― 시대와 관계있는 중요한 이슈들을 다루어야 한다. 기후 변화가 중대한 안건이 되어야 하며, 이해당사자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한다. 이런 세미나는 엔터테인먼트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발표자에게 어떤 특혜도 주면 안 된다. 그들은 현재 직면한 이 심각한 상황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직해야 하고, 그것을 두려워해야 하며, 각각의 입장이 상충하는 지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와 관련해 기술의 변화가 현대사회에 가져오는 효과도 중요한 논제로 다루어야 한다. 널리 인식되지 않은 일일지 모르지만, 기술문명은 현대사회를 조각내고, 사회문 제에 집중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싱크탱크의 역할은 보통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문제들을 드러내 주목받게 하고, 공론 대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다소 진부할지 모르지만 싱크탱크의 역할을 말한다면 이렇다. 싱크탱크 집단은 권위나 합법성을 상징하는 것들에 저항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또 의견을 수렴할 때는 특정 이해 단체의 편협한 의제를 멀리하면서 최대한 다양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

한국의 싱크탱크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역할에 걸맞게 여러 언어로 자신들이 한 일을 알릴 필요가 있다. 영어가 분명 세계 공용어이지만 세미나를 열고 그 결과물을 낼 때는, 중국어•일본어•아라비아어와 인도네시아어나 베트남어 같은 개발도상국 언어까지 사용해야 한다. 아울러 자료집이나 정책 제안서 같은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도록, 제안 대상국의 언어로 만들어 쉽고 빠르게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국 서울이 글로벌 싱크탱크의 중심으로 거듭나는 것은 단순히 워싱턴의 싱크탱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창안 능력에 달려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싱크탱크 집단의 연구와 논의가 같은 의제를 놓고 함께할 수 있는 범지구적 네트워크로 연결되게 해야 한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더 많은 이들이 논의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일일 뿐 아니라, 새로운 정책노선을 범지구적 차원의 공동 실행에도 기여할 수 있다. 기후 변화나 사이버 공간의 향후 동향 같은 문제는 매우 복잡하며 다양하므로 서로 충분히 듣고 입장을 나누는 신중한 협력 태도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은 적절하게 그 영역을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서울의 싱크탱크 집단들은 규모에 따라 협력체제를 조율해야 한다. 큰 규모의 싱크탱크는 월드클래스의 전문가를 영입할 만한 넉넉한 예산을 갖춘 반면, 작은 규모의 싱크탱크는 그 유연성에서 한결 뛰어나기에 일반 시민들의 요구를 더 구체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서울시가 여러 층위에 산재하는 국내 문제의 여러 리소스와 전문 지식들을 싱크탱크들 간에 공유할 수 있도록 뚜렷한 의지를 보이고 실천한다면 분명 혁신을 위한 생태계는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서울시에서 진보 성향을 지닌 민간 싱크탱크가 현안들의 중대한 문제 제기를 한다 해도, 그런 안건을 논의하는 자리에 청중을 범지구적으로 확보 하지는 못한다. 보고서 등을 영어나 다른 외국어로 만드는 일이 거의 없고, 국제적인 파트너십을 맺은 경우도 드물기 때문이다. 보수 성향을 지닌 싱크탱크 집단들은 보통 사람이나 범지구적 차원의 문제 ― 예컨대 젊은이를 위한 일자리나 환경 파괴, 부의 불균등 같은 문제 ― 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국제 금융이나 안보 등에 역점을 두고 있다.

결국 한국의 싱크탱크 집단이 가장 성공적인 싱크탱크 집단으로 거듭나는 길은, 그들이 한국적인 인식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일이다. 그들이 진정 범지구적인 집단이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 특유의 지적 토양 위에서 형성된 한국만의 문제 인식 방법에서 기인한다. 어디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 한국적인 진정성과 내적 토대가 필요한 셈이다.

우선 한국이 범지구적 연결망을 지닌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장 큰 강점은, 전통적으로 한국에는 제국주의적 기조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은 국제적으로 균형감 있고 호혜적인 관계를 많이 확보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싱크탱크 집단은 선진국들이 하지 못하는 ‘열린 플랫폼’으로 논의의 장을 마련할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한국은 지속 가능한 발전을 포용할 수 있는 동시에, 권력을 분배하는 국가 통치의 오랜 전통을 조선시대부터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전통은 국제적으 로 영향력 있는 정책 혁신을 가능하게 할 만한 충분한 토대가 될 것이다. 비교적 최근의 산업발전만이 아니라 14세기 혹은 18세기 한국의 역사에서 있었던 개혁을 볼 때, 한국은 분명 국제적으로 영향을 미칠 만한 역량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향후의 싱크탱크를 위한 하나의 참조 모델을 한국의 역사 속에서 찾아본다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집현전일 것이다. 집현전은 정부기관 안에서 정책을 논의하는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세종대왕의 통치 기간(1418~1450)에는 높은 자율성을 보장받기도 했다. 집현전 학사들은 각자의 지적 바탕에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고,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얼마든지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연구는 ‘백성을 위한 통치’라는 기조에서 수많은 구체적인 사례를 담은 중요한 정책집 발간으로 이어졌다. 집현전에서는 ‘좋은 통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중국과 한국의 선례들을 살피면서 충분히 숙의할 수 있도록 학사들에게 넉넉한 시간을 주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집행 중인 정책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유학사상의 전통적인 텍스트를 반드시 참조하면서, 당대의 문제에 관해서도 철저하게 실증적으로 연구했다. 이러한 결과는 세종대왕이 더욱더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시행하는 정책에 철학적이고도 역사적인 토양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집현전의 이 같은 전통, 이미 시행 중인 정책에 대해 윤리적 숙의를 거치는 전통을 되살려 오늘의 한국 싱크탱크 집단이 범지구적 함의를 지닌 새로운 모델로 거듭날 수 있을까? 현재 상황에서 한국의 싱크탱크 중에서 지난 세기의 농업•무역•외교•안 보와 관계있는 정책을 숙의하는 집단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한국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그를 위한 커다란 가능성과 역량이 숨어 있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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