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라고 묻지 않는 한국의 충동 소비자” (중앙일보 2016년 9월 10일)

중앙일보

“ ‘왜’ 라고 묻지 않는 한국의 충동 소비자”

2016년 9월 10일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

 

일전에 나는 문구점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개학에 대비해 펜•연필•프린터용지를 사기 위해서였다. 계산대에 섰을 때 나는 현란한 모습으로 포장된 캔디바•사탕•초콜릿 같은 제품의 무더기와 마주쳤다. 하지만 그곳은 문구점이었다. ‘문구점에 건강에 안 좋은 간식이 이렇게 많이 눈에 띄는 이유는 뭐지’라고 나는 생각했다.

답은 뻔하다. 캔디바는 문구류와 아무 상관없지만 제일 잘 보이는 데 배치돼 있다. 캔디바는 손님들에게 필요도 없고 영양가도 없지만 손님들이 충동적으로 캔디바를 살 것이라고 상점 주인들이 기대하기 때문이다.

15년 전 한국에서는 요즘과 달리 캔디바를 쌓아 놓는 문구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 문구점에는 사무나 공부에 필요한 종이와 펜을 사람들에게 공급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모든 게 바뀌었다. 문구 상점은 사람들을 유혹해 그들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게 만든다. 비즈니스가 성공하려면 그러한 충동적인 행동을 유도하는 게 필요하다고 인식되고 있다.

같은 원칙은 서점에서도 적용된다. 학생들이 정치•문학•철학에 대한 책을 몰입해 읽던 자리의 일부를 동물 봉제 인형, 백팩 등 사소한 소품들이 차지하고 있다.

모든 레스토랑은 빛을 발하는 듯한 맛있는 음식 사진을 넣은 간판을 내걸고 있다. 우연히 레스토랑 앞을 지나가는 행인들의 욕구에 호소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뉴노멀(new normal)을 수용했다. 오늘의 경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나 사회에 좋은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에 어필해 그들이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도록 설득한다. 그런 식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게 뉴노멀의 가정이다. 그들이 구매한 물품이 진정 필요한 것인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충동이나 단기적인 만족을 경제의 원동력으로 삼는다면 그 결과는 지극히 위험하다. 원초적인 갈망이나 허구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 외에는 인간 활동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시민은 소비자가 된다. 자신의 행동에서 그 어떤 상위의 윤리적 목표도 찾을 수 없는 소비자다. 뭔가 보다 위대한 국가적 계획은 더 이상 없다. 소비자들은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노리는 영업하는 사람들은 이윤 추구 외에 관심이 없다.

경제에 대한 그러한 접근법은 외부에서 침투한 것이라 한국 문화와 맞지 않는다. 한국의 핵심적 가치는 인내•자제•겸손, 그리고 절제된 의복이나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검소함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잘사는 집안도 이러한 절제의 문화를 실천했다. 옛날 한국의 잘사는 사람들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평범한 가옥에서 살았다. 유럽의 부유층과 달리 그들은 으리으리한 대저택이나 타운하우스에서 살지 않았다.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전통 한국인들은 밥 한 톨도 아꼈으며 아무것도 내다 버리지 않았다. 한국의 미학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무런 꾸밈이 없는 소박한 물품들이었다.

충동 경제의 비극은 단순히 불필요한 낭비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삶에서 ‘왜’라고 묻는 감각이 사라진 게 문제다. 그들은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한다. 그들은 소비자일 뿐이지 시민도 아니고 가족의 구성원도 아니다.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도 궁극적으로 붕괴한다. 사람들은 모든 일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다고 느낀다. 자신의 행동과 벌어지는 일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른다.

많은 젊은이가 소비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소비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사회적인 압력이나 마케팅 때문에 소비 행동에 착수하도록 강요되는 느낌을 받지만 소비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다. 의미 있는 친구나 의미 있는 소유물이 사라진 가운데 개개인은 점점 더 외롭다.

충동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에는 더 큰 어둠이 내재돼 있다. 충동 경제는 문화적 퇴폐주의를 부추긴다. 퇴폐주의는 보수와 리버럴(liberal)을 따지지 않고 사회 곳곳의 모든 측면에 스며든다. 옳고 그름을 가려내거나, 더 나은 사회를 구상하거나,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퇴보한다. 우리는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을 통제하고, 심각한 사회문제에 대응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게 된다

한국의 젊은 세대는 ‘충동적인 행동은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교육받고 있다. 이런 세대는 모순적인 사실(事實•fact)을 이해하는 노력에 필요한 인내력이나 자기통제력이 결여될 것이다. 편의적인 허구와 복합적인 진리를 구분하는 능력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상상하고 능동적으로 미래 목표를 위해 일하는 능력을 상실할 위험에 빠져 있다. 꼭 필요 없는 사치가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이끄는 가운데 우리는 이해 능력을 벗어난 사회의 전개에 끌려다니는 우리 모습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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