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November 2016

“어수선한 시절, 퇴계의 진리를 되새기다” 중앙일보

일본에서 이퇴계 관련 학회에서 기조열설을 했어요.

중앙일보 보도는

 

“기조 발표한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이만열) 경희대 교수는 “우리 삶의 도덕적 의미를 제어하는 방도를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건강한 정치문화를 창출해 낼 수 있다”고 제안해 주목받았다. 이 교수는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지속 불가능하고, 소비와 충동적인 욕망에 내몰린 단말마적 시각에 머물러 있어서 공동의 미래를 열어갈 비전을 제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 신유학(新儒學)의 전통, 특히 퇴계가 주창한 경(敬)의 회복으로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중앙일보

“어수선한 시절, 퇴계의 진리를 되새기다”

2016년 11월 30일

정재숙

 

 이 어지럽고 황망한 때에 우리 마음을 그윽하게 이끌어줄 한 말씀은 없는가. 지난 26~27일 일본 후쿠오카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26차 퇴계학(退溪學) 국제학술회의는 정치 격변의 시절에 ‘왜 다시 퇴계인가’를 묻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광호 국제퇴계학회 회장은 “현대 인류가 처한 위기 상황을 생각하면 이 시대가 요청은 하면서도 찾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 그 마음의 근원에 관해 500여 년 전 퇴계가 밝힌 진리는 지금 더 절실하다”고 개회의 뜻을 전했다. 주최 측인 한국을 비롯해 일본•중국•캐나다에서 모인 학자와 회원 150여 명은 퇴계 이황(1501~70)이 걸어간 인간의 근원적 혁명의 길을 어떻게 21세기형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을까, 28편 논문 발표와 토론으로 따졌다.

일본서 퇴계학 국제학술회의 한•중•일•캐나다서 모인 150여 명선생이 닦은 ‘경(敬) 사상’ 열띤 토론 기조 발표한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이만열) 경희대 교수는 “우리 삶의 도덕적 의미를 제어하는 방도를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건강한 정치문화를 창출해 낼 수 있다”고 제안해 주목받았다. 이 교수는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지속 불가능하고, 소비와 충동적인 욕망에 내몰린 단말마적 시각에 머물러 있어서 공동의 미래를 열어갈 비전을 제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 신유학(新儒學)의 전통, 특히 퇴계가 주창한 경(敬)의 회복으로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주자(朱子)와 퇴계와 다산(茶山) 정약용의 철학을 비교한 돈 베이커 캐나다 브리티시콜럼비아대학 교수는 “세 학자 모두는 진정으로 인간답다는 것은 우리 동료인 타인들과 타당하게 상호작용하고 타인의 이익을 나의 이익에 우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갈파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 배양의 방법을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베이커 교수는 “우리가 세 분이 제공하는 마음공부의 조언에 귀 기울인다면 이 세상은 보다 나은 곳이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밖에 곽정례 경희대•김언종 고려대 교수의 ‘조선 유학의 일본 전파 경로에 관한 재론’, 양일모 서울대 교수의 ‘계몽기 한국 잡지의 퇴계 담론과 일본의 지식인’ 발표가 눈길을 끌었다.

참석자들은 퇴계학 국제학술회의 개최 40주년을 기념해 ‘이퇴계 선생 현창비(顯彰碑)’, 위패를 모신 서원 ‘경신당(敬信堂)’이 서있는 쇼교지(正行寺)를 답사했다. 다케하라 치묘(竹原智明) 주지는 “‘경(敬)하지 않음이 없도록 하라’는 퇴계 선생의 정신을 받들며 살아가고 있다”고 인사했다. ‘이퇴계 선생에게 배우는 모임’이 활성화된 일본인의 퇴계 선생 사랑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중국의 꿈’은 미국인가 (허핑턴포스트 2016년 11월 30일)

허핑턴포스트

‘중국의 꿈’은 미국인가

2016년 11월 30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얼마 전에 어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 남경에 다녀왔다. 거기서 안내를 해주는 학생에게 그 유명한’부자묘(夫子廟)’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도심이 아닌 외곽의 옛 정취가 남아 있는 찻집에서 차라도 마시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경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명나라 때까지 ‘금릉(金陵)’이라 불렸던 ‘남경’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연구를 해왔다. 도쿄대학(東京大学)과 하버드대학에서 중국문학을 공부했을 때 남경을 무대로 지어진 시를 많이 읽었다. 17세기의 산문 잡기에 등장하는 진회하(秦淮河)의 아름다운 풍경과 대학시절 소설 『홍루몽(紅楼夢)』을 읽을 때 상상했던 18세기 남경의 죽 늘어선 저택들의 모습이 여전히 뇌리에 스치고 있다.

그러나 시끌벅적한 거리를 걸으며 옛 금릉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했던 나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부자묘 주변의 옛 건물은 이미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패스트푸드점과 양복점 등이 들어선 볼품없는 콘크리트 구조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질 좋은 고급 차를 파는 곳도 몇 집 있었지만 길가 상점에서 팔고 있는 음식과 기념품들은 방콕이나 L.A에서 파는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쉽게도 남경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것들은 끝내 찾지 못했다. 시인, 소설가는커녕 장인과 기술자들의 모습까지 이젠 사리지고 없었다.

부자묘의 내부도 옛 정취가 사라졌다. 벽은 석벽과 토벽 대신 콘크리트가 발라져 있었고, 목수의 실력이 나빴는지 벽과 바닥을 잇는 접합부의 마감은 허술했다. 진열된 가구들도 싸구려 느낌이 들었고 벽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식상한 그림들이 여기 저기 걸려 있었다.

나는 남경에서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과 일본의 나라(奈良) 동대사(東大寺)에서 볼 수 있었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역사의 흔적과 끝내 조우하지 못했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가 남경의 과거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거리를 다녀 보니 그 화려했던 남경의 역사와 문화는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고, 지금의 남경은 과거와 단절된 낮선 도시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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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remarkable quotes cited by Hope May at tonight’s Asia Institute Seminar on peace, history and memory

Tonight’s seminar by Hope Elizabeth May brought together a collection of academics, diplomats, reporters and concerned citizens for a deeper consideration of what is necessary for true peace in Korea and in Northeast Asia. Dr. May focused on the tradition of peace making that dates back to the Hague Conference of 1907. The seminar suggested how the history of peace, and the tradition of “positive history” could inspire us to use our imaginations to come up with new solutions to today’s challenges.

 

hope

 

She Hope May professor of philosophy at Central Michigan University, cited two remarkable quotes.

“The world progresses, in the slow and halting manner in which it does progress, only in proportion to the moral energy exerted by the men and women living in it.”

Jane Addams

Nobel Peace Prize Winner

1931

“Souls interact across time and space. The decisions people make in a difficult hour, the principles they either abide by or abandon in moments of truth, have consequences not just for their own lives, but well beyond.”

Natan Saransky

Soviet dissident

“「中国の夢」:欧米化?それとも新しい道を開く?” (ハフィントンポスト 2016年 11月 23日)

ハフィントンポスト

“「中国の夢」:欧米化?それとも新しい道を開く?”

2016年 11月 23日

エマニュエル・パストリッチ 

 

 

最近、会議のため南京へ行くことになった。あの有名な「夫子廟」へ連れて行ってほしいと案内係の学生さんにお願いした。南京は初めてなので、下町の昔ながらの喫茶店でお茶を飲みながらのんびりしたいと思った。

今回南京に来たのは初めてだったが、明の時代まで「金陵」と呼ばれた「南京」のことはよく研究していた。東京大学とハーバード大学で中学文学を勉強したとき、南京を舞台にした詩集をたくさん読んだ。十七世紀の散文雑記で描かれた秦淮河のきれいな景色に印象深く、大学で小説『紅楼夢』を読んだときも、十八世紀の南京の軒を連ねる邸宅が何度も頭に浮かんでいた。

しかし、賑やかな街を歩いて昔の金陵の風貌を探そうとした私の努力は無駄だった。夫子廟辺りは昔の建物が既に取り壊され、ファーストフード店や洋服屋の入っているつまらないコンクリート造建物が立ち並んでいる。確かに上質なお茶を売っている店も何軒かあるが、そこで売られている食べ物やお土産はバンコク、ロサンゼルスのとほぼ変わらない。結局、南京製のものには一つも出会わなかった。詩人、小説家どころか、匠、職人の姿までいつの間にか消えていた。

夫子廟のなかも昔の風貌がなくなった。石壁や土壁の代わりにコンクリートの壁が溢れている。大工さんの腕が悪く、壁と床のつなぎ目がいい加減に仕上げられていた。置かれた家具の作りが悪く、壁に掛けられた絵画があり溢れたものばかりだった。

あの日、南京ではパリのノートルダム大聖堂や日本奈良の東大寺で拝見したような心を動かされる歴史の跡には出会えなかった。南京の過去はすべての中国人が勉強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ある本の中で読んだ気がしたが、街中を歩いてみたら、その華やかな歴史文化は今の南京とほぼ関わりなくなったように思われる。

案内係の学生さんのおかげで昔風の喫茶店が見つかった。喫茶店を出たとき、悲しい気持ちで胸がいっぱいになった。中国の歴史伝統が次から次へと消えていく。これは文化大革命のせいではなく、消費文化の激しい成長が招いた結果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そしてこの悲しさは確実で深いものだった。

しかし最も悲しいのは、古代中国は持続可能な有機農業によって世界一のシステムを作り出し、国の複雑な官僚制度を支え、多くの人々を養えてきたにも関わらず、その素晴らしい有機農業の伝統が捨てられてしまった。アメリカ農学者フランクリン・ハイラム・キング(F• H• King)がその著書『東アジア四千年の永続農業-中国・朝鮮・日本』(Farmers of Forty Centuries, or Permanent agriculture in China, Korea, and Japan)で、東アジアは確実な永続農業のモデルを作り出しており、アメリカはそれを導入すべきと呼びかけている。一方、中国は致命的な化学肥料と農薬を取り入れたせいで、農業は持続可能なものでなくなった。古代中国の農業文明の素晴らしい知恵が最も必要とされた今、その跡取りが見つからない。

また、消費社会の残酷な価値観の反面、中国人の素朴、節約、親孝行、謙遜の人柄がとても魅力的に思われるが、これらの美徳を求めに中国にきたら、あなたはきっとがっかりするだろう。

 

米化の夢

 

欧米文化が受けている悪い影響を減らし、そのあり方を求めるために、多くの欧米人が中国に訪れてくる。同じ目的で、アメリカ社会を支える制度を蝕んでいる物質主義と軍国主義に絶望感を持つ私は、中国文学を勉強することになった。中国の儒学、仏学及び道学思想は、人間のすべてを金銭で評価するアメリカに新しい基準を提供している。 Read more of this post

Defining “Trumpism”

Please let me be the first to coin the word for politics and diplomacy “trumpism.”

Trumpism consists of doing something so far out of left field that it confuses your opponents and allows you to take control of the situation. Trump’s suggestion that he might meet the leader of North Korea, like his enthusiastic reaching out to Putin, is typical of this strategy. But I would like to say it is an extremely high-risk approach and is unlikely to be successful in the long run.

‘Trump may meet N. Korean leader soon’

Korea Times

 

“朴槿惠因何堕落?” (中央日报 2016年 11月 14日)

 

中央日报

“朴槿惠因何堕落?”

2016年 11月 14日

贝一明

 

 

如果说,我们并不是只想证明“我是对的”,而是关心着今后的道路,则我们的视野应超越目前,不能只盯着使朴总统堕落的丑闻的核心人物。我们应扪心自问,是韩国政治文化中的何种因素纵容了极少数人搞得国家政局飘摇不定。

我们应认识到,假如有影响的有识之士没有在目睹这一史上最差一届政府后仍然无动于衷的话,那么事情也不至于变得如此无法收拾。

我不知道崔顺实这个名字,但却经常听许多政商人士讲过青瓦台见不得人和不负责任的决策,青瓦台在做出重要决定时根本不听专家建议的事已是公开的秘密。韩国的最高层精英们几乎无一例外地对他们应尽的责任义务麻木不仁:他们有必要去呼吁国家在施政时更负责任、有义务帮助无法接触到高级情报的公民去理解多年来无休止的政治危机的本质。

有一点是可以确定的。每当同有影响人士谈话时,我就会听到他们在谈论某些人的名字、在预测谁会被任命为到何种职务,但却从来没听到有谁发出“什么对韩国人最好?”的提问。问题不在于特殊人物或特定的政策,而在于韩国的政治文化。

让我们正视现实吧。当今韩国最大的威胁既不是朝鲜,也不是经济发展停滞抑或政治人物的行径,而是文化颓废的蔓延。在我们的文化当中,个人对民族的未来并不关心,他们贪恋于酒色美食、酒、性快乐、休闲体育,人生的目标就是眼前的满足,奉献的价值已消遁无踪,这是典型的颓废。

悲剧在于,我们旨在刺激消费的不当努力释放了人类追求原始本性的动力,这些动力正取代韩国传统社会所要求的合理性、自制力、正念,成为我们年轻人的行为模式。

只要看上几分钟的电视就可看到当今对韩国造成威胁的离奇古怪的文化颓废了。无所顾忌无节制地大吃大喝、满足感官刺激的画面不停地在上演,身穿在20多年前可能因过于“色情”而遭禁的衣服的女子出现在广告中。

这样一来或许能卖出一些商品,但这样的策略会招致道德的堕落,在所有层次上削弱施政根基。现在,国家政策与国家福址、安保和价值观无关,沦落成了争权夺利的机会。我们应认识到,如果这样的颓废主宰了整个社会,我们的经济政策或技术政策将无法解决这一问题。

“羞耻感”的消失也是这样的韩国文化堕落的根由之一。传统社会将抛弃年迈父母之类的事情视作奇耻大辱。正如“君子必慎其独也”所讲的那样,道德上的义务已深入骨髓。伦理无关乎别人是否耳闻目睹,但上世纪韩国人逐渐认为,这些伦理宣传是禁锢式的、填鸭式的,被视作是与“活在当下”的现代生活格格不入的旧时代的残留。

廉耻的丧失使人们觉得,只要照顾好子女、在工作单位尽到职责自己就活在道德之中。换言之,去思考周围人行动的伦理意义的必要性已不复存在。

还有一个原因。在数字化时代、周边事物不断改变的时代,对因果关系的认同感逐渐降低。我们无法再清晰明了地意识到我们每天所做的事情和我们所处世界发生的事之间的联系了。我们泛泛地认为它们之间没有任何联系。

我们在咖啡馆用的也是一次性杯子,不会首先想到若使用纸杯或塑料杯会对环境有何影响。我们对咖啡馆服务员傲慢无礼,没有意识到我们对待他们的态度在侵害着我们的文化。

我们应恢复韩国儒教文化中的精华部分,最首要的是要认识到,我们的所有行为最终是与道德联系在一起。读书、就餐、谈笑等我们所有的行为都会对社会产生积极影响。只有驾驭生活上的道德含义,我们才能着手建设健康的文化生活。我们无法改变人类的本性,但可以在生活的所有方面重建伦理行为可期的高标准文化,籍此来对政治人物产生压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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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urce of a sick political culture” (JoongAng Daily November 14, 2016)

JoongAng Daily

“The source of a sick political culture”

November 14, 2016

Emanuel Pastreich

 

 

If we are interested in progress, and not simply in feeling self-righteous, we must look beyond the central players in the recent scandal in the Blue House which has brought down President Park Geun-hye. We need to ask ourselves what was it in the political culture of Korea that allowed a tiny group of people to control national policy and to do so for capricious reasons.

We must recognize that the situation would not have gotten so out of control if educated and influential Koreans had not been so passive when they saw the worst mismanagement of Korean government in recent history. I did not know the name Choi Soon-sil, but I had heard from many people in government and in business about the secretive manner in which policy was handled in the Blue House and the complete lack of accountability. It was no secret that critical decisions were being made without the advice of any experts on a regular basis.

But almost without exception, the best and the brightest of Korea felt that they had no particular responsibility to demand accountability or to help their fellow citizens who did not have access to privileged information to understand the nature of a political crisis that went on for years.

One thing that I can say definitively: in my many conversations with influential figures I heard the names of people and I heard speculation about who would be appointed to this or that position, but I never heard anyone asking “What is best for the Korean people.”

The problem lies in the political culture, and not in particular individuals, or particular policies.

Let us face the truth: the greatest threat to the Republic of Korea today is not North Korea, nor the economic slowdown, nor the actions of individual politicians. The greatest threat is the spread of decadence in the culture. We have a culture wherein individuals feel little concern for the future of the nation and they indulge thoughtlessly in food, in drink, in sexual pleasures, in vacations and sports. The purpose of life has become short-term satisfaction and sacrifice has disappeared as a value. This is classic decadence.

Tragically, in a misconceived effort to create market demand in Korea, we have unleashed the primitive forces in human nature and held them up as a model for our youth, instead of the rationality, self-control and mindfulness that traditional Korea demanded. One need only look at the television for a few minutes to see the grotesque cultural decadence that threatens Korea. Just watch the endless scenes of Koreans stuffing their faces with food in thoughtless indulgence or witness advertisements that feature women clad in a manner that would have been banned as pornography twenty years ago. Such strategies may sell some products, but they create a moral decadence that undermines governance at every level. Policy has ceased to be about the national welfare, security or values, and degenerated into mere opportunities for financial enrichment and amassing power.

One cause of the decline in Korea’s culture is the loss of a sense of shame. In traditional society, certain actions were simply considered to be shameful and wrong, such as the abandonment of an aged parent. The moral imperative was internalized. As the expression goes, “The gentleman should be cautious even when he is alone.”

But over the last century Koreans increasingly have come to view such a stress on ethics to be restrictive and oppressive, to see such behavior as an archaic relic that contrasts poorly with a modern life of instant gratification. But the loss of a sense of shame allows people to feel that if they take care of their children, and fulfill their assigned duties at work, they are acting in a moral manner. That is to say, there is no need to think further about the ethical significance of the actions taken by those around them.

Another factor has been the diminishing awareness of causality, the relationship between actions, in this age of digital representations and constantly shifting images that surround us. We can no longer see clearly the relationship between what we do on a daily basis and what is transpiring in the world around us. More often than not we think there is no relationship.

We drink coffee from throw-away cups — even when sitting at a café — without the slightest clue of how the use of that paper and plastic impacts the environment. We treat the people who serve us at the café in a flippant and disrespectful manner without any concept of how our attitude towards them degrades the culture of our country.

We need to return to the best of the Korean Confucian tradition and recognize above all that every act that we make is ultimately a moral act. Whether reading a book, eating a meal or talking to a friend, all of our actions can have a positive impact on society.

Only by regaining control over the moral significance of our lives can we start to create a healthy political culture. We cannot alter human nature, but we can create pressure on politicians by reestablishing a culture in which high ethical behavior is expected in every aspect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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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제 협력 전문가는 문학을 전공해야 한다” (아시아문화와경제 2016년 9월 12일)

아시아문화와경제

“모든 국제 협력 전문가는 문학을 전공해야 한다”

2016년  9월 12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국제 협력 연구에서, 어떤 사람이 외교나 안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 그 역할이 정부 자체에 있든, NGO, 정부, 기업 사이의 국제적 교환과 관련된 광범위한 지식 분야에 있든, 경제학, 개발 정책 또는 국제 협력 연구에 풍부한 경험을 가져야 한다는 가정이 일반적이다.

학부 시절 단 한 과목의 경제학 강좌도 수강하지 않았고 일리노이 대학의 교수가 되어서야 정말로 진지하게 국제 협력을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내가 왜 뒤늦게 국제 협력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되었는지, 그리고 국제 협력 및 외교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해명할 필요성을 느낀다. 실제로 선천적으로 다소 성격이 급한 나는 위의 일반적인 가정에 대하여 반론하고자 한다. 나는 오히려 국제 협력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특히 오늘날,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력에서 몇몇 인문 강좌를 수강해야 할 뿐 아니라 문학 (아니면 예술이나 철학) 분야를 전공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물론 문학 전공이 외교로 향하는 최선의 첫 단계라는 사실이 진실일 수 있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확실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단편적인 충고는 약간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한국과 중국에서나, 또는 이태리나 프랑스에서나, 인문학 전공이 공무원의 해외 근무에 필수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심지어 20세기 초만 해도, 유럽의 경우 라틴과 그리스 전통에 대한 깊은 지식,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중국 고전적 전통에 대한 깊은 지식이 공통점 – 스타벅스나 Economist지에 대한 애착에서 찾기를 바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공통점 – 발견에 필수적이었다. 문학과 철학, 공통의 용어들, 그리고 철학적 과학적 원리에 기반한 그런 공통의 문화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규범의 확립을 도왔다.

이름 바로잡기

국제 협력에서 언어를 다루는 일이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결국 언어의 취급은 문학과 작문 공부에서 배우는 것이다. 이것을 국제 협력에 관한 유명한 전문가, 즉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험프티 덤프티에게서 인용해 보자.

“너를 위한 영광이지!” 험프티 덤프티가 말했다.

“영광이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앨리스가 말했다.

험프티 덤프티는 거만하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내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모르지. 내 말은 ‘너를 위한 근사하고 압도적인 논쟁’이라는 뜻이야!”

“하지만 ‘영광’이 ‘근사하고 압도적인 논쟁’을 의미하지는 않잖아”, 앨리스가 반박했다.
험프티 덤프티는 약간 경멸조로 말했다. “내가 단어를 사용할 때는,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을 선택했음을 말하는 거야 – 딱 그 뜻이야.”

앨리스가 말했다. “여기서 문제는, 네가 단어를 여러가지 다른 것을 의미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이겠지.”

험프티 덤프티가 말했다, “그 문제는, 어느 의미가 주가 되느냐겠지. 그게 다야”

험프티 덤프티가 여기서 말하고 있고 루이스 캐롤이 우리의 주의를 끌어들이는 본질적 요지는,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는 행동이 정치와 권력의 가장 중요한 행동이며, 그것이 종종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작용하지만(이념적 변화는 본질상 육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의 변화는 가장 깊은 수준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험프티 덤프티는, 단어의 의미를 통제하는 것이 권력의 본질임을 시사한다. 비유해 보자면, 용어의 재정의로 초래된 변화는 핵반응 수준인 반면 일상적 외교에서 초래되는 변화는 화학적 반응 수준으로 발생하며, 보다 가시적이지만 심오함은 덜하다.

“국제연합”, “테러와의 전쟁”, “국제 사회”, “정직한 브로커” 등과 같은 용어에 대한 의미를 정하는 능력은 국제 관계에서 궁극적인 권력이며, 아이러니, 또는 위선과 부정확의 영향에 의해 이러한 용어들이 침해 받거나 약화되는 정도만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용하는 용어로서의 기능이 중지된다. 이 문제는 본질적으로 문학의 문제인 것이다.

공자 또한 어떤 형태든 권력이나 담론에 대한 용어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했고, 관직에 대한 전제 조건인 기술 훈련을 배제할 정도로, 글쓰기는, “wen”(문 文)의 연구가 공자 연구 프로젝트에 매우 중심적이었던 주요 이유가 될 것이다. 공자가 이용한 용어는 “이름 바로잡기”(정명 正名)였으며, 그는 사람, 제도 및 관습을 기술하기 위해 이용되는 용어를 정확히 하는 것(정명 正名)이, 가난한 사람을 먹이는 박애나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특정 행위보다, 평화를 유지하고 세상을 공정하게 만드는 데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공자는 “이름 바로잡기”로 무엇을 의미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사상과 현대의 관련성은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으로, 나는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는 심각한 문제의 대부분이, 우리가 일상의 말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원래 의미와 그들이 실세계에서 묘사하기 위해 이용되는 물체의 실제 성질 사이에 심각하게 커져가는 갭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는 이 갭이 우리가 부딪치는 가장 도덕적인 문제를 규정하며 공자의 접근이 상당히 실제적으로 우리가 실행 가능한 해결책에 도달하도록 돕는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에 우리의 일상 생활에 중심적인 몇 가지 용어의 예가 있지만 그 의미는 지난 20년에 걸쳐 상당히 변했다:
“은행”, “기업”, “정부”, “프라이버시”, “재산”, “군대”,“지능”
이러한 용어들의 의미 변화는 우리 불행의 원천이다. 그 의미들이 변하지 않았다면 사태가 이전 방식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느낌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기능하지 않는 제도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많은 좌절과, 윤리의 결핍 인지나 현대 세계의 잔인성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제도와 실제 제도 사이의 갭과 관련되어 있다.

“무엇이 박근혜를 추락시켰는가” (중앙일보 2016년 11월 12일)

중앙일보

2016년 11월 12일

“무엇이 박근혜를 추락시켰는가”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우리가 그저 ‘내가 옳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데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을 추락시킨 스캔들의 핵심 인물들에 대한 응시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한국 정치문화의 어떤 요소가 극소수 사람들이 국가 정책을 변덕스럽게 좌지우지하도록 허용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만약 영향력 있는 식자(識者)들이 근래 역사상 최악의 정부 운영을 목격하고도 그토록 수동적이지 않았다면 상황이 이토록 통제 불능이 되지는 않았다고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나는 최순실이라는 이름을 몰랐지만 많은 관계•재계 사람들이 청와대의 비밀스럽고 무책임한 정책 결정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 왔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전문가의 정기적인 조언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거의 예외 없이 한국의 최고 엘리트들은 책임 있는 국정 운영을 요구할 필요성이나,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없는 동료 시민들이 수년간 지속된 정치 위기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특별히 느끼지 못했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여러 차례 대화할 때마다 나는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들었고 이런저런 자리에 누가 임명될 것인지에 대한 추측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도 “무엇이 한국 사람들에게 최선인가”를 묻는 것을 듣지 못했다. 문제는 특정 인물이나 특정 정책이 아니라 정치문화다.

진실을 직시하자. 오늘날 대한민국에 최대의 위협은 북한도 경기침체도 특정 정치인의 행태도 아니다. 가장 큰 위협은 문화적 데카당스(decadence•퇴락)의 확산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 개개인은 민족의 미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들은 별생각 없이 음식, 술, 성적 쾌락, 휴가와 스포츠에 탐닉한다. 단기적 만족이 인생 목표가 됐으며 희생의 가치는 사라졌다. 이런 게 전형적인 퇴락이다.

시장 수요를 창출하려는 잘못된 노력 때문에 우리가 인간 본성의 원시적인 힘들을 풀어놓았다는 게 비극이다. 그 힘들은 전통 한국 사회에서 요구됐던 합리성, 자제력, 마음 챙김(mindfulness)을 대신해 우리 젊은이들에게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단 몇 분만 텔레비전을 봐도 오늘날 한국을 위협하는 기괴한 문화적 퇴락을 목격할 수 있다. 생각 없이 무절제하게 꾸역꾸역 음식을 먹어 가며 오감을 만족시키는 장면이 끝없이 반복된다. 20여 년 전에는 ‘포르노그래피’라는 이유로 금지되었을 차림새의 여성이 광고에 나온다.

얼마간 상품을 팔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전략은 모든 수준에서 가버넌스 기반을 약화시키는 도덕적 퇴락을 초래한다. 이제 국가의 복지, 안보나 가치와 무관하게 되어 버린 정책은 부와 권력을 쌓는 기회로 전락했다. 사회 전체를 이러한 퇴락이 차지했다면 우리는 경제 정책이나 기술 정책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염치’가 사라진 것도 이러한 한국 문화 쇠퇴의 한 원인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나이 든 부모를 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 그야말로 창피하고 그릇된 것으로 간주됐다. “군자는 홀로 있을 때마저도 조심해야 한다(君子?其?也)”는 말이 표현하듯 도덕적 의무가 내면화돼 있었다. 윤리는 남의 이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지난 세기에 한국인들은 점차 이러한 윤리의 강조를 제한적•억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즉시 만족’으로 표상되는 현대 생활과는 맞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하게 됐다.

염치의 상실로 사람들은 자녀들을 보살피고 일터에서 책무를 다하기만 하면 자신이 도덕적으로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됐다. 즉 주위 사람들 행동의 윤리적 의미에 대해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사라졌다.

또 다른 요인이 있다. 디지털 표현의 시대, 주변의 이미지가 끊임 없이 바뀌는 시대에는 인과관계에 대한 인지도가 낮아진다. 우리는 우리가 매일 하는 일과 우리 주변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일 사이의 관계를 더 이상 명료하게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대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카페에 앉아 있을 때에도 일회용 컵을 쓴다. 종이나 플라스틱을 사용하면 환경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카페 종업원들을 건방지고 무례하게 대한다.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우리나라 문화를 깎아내린다는 개념이 없다.

우리는 한국 유교 문화에서 최상의 좋은 것들을 복원해야 하며, 무엇보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궁극적으로 도덕과 연관됐다고 인식해야 한다. 독서•식사•담소를 포함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 삶의 도덕적 의미를 다시 통제할 수 있어야만 우리는 건강한 정치문화 만들기에 착수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 본성을 바꿀 수는 없지만, 모든 삶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윤리적인 행동이 기대되는 문화를 재확립함으로써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넣을 수 있다.

 「韓国に「未曽有の大嵐」も 朴政権支持率急落と米大統領選で」  YAHOOニュース

 YAHOOニュース

エマニュエル・パストリッチ インタービュー

韓国に「未曽有の大嵐」も 朴政権支持率急落と米大統領選で」

2016年11月10日

 

共和党のドナルド・トランプ氏が、メディアの大方の予想を覆して、米大統領選を制した。友人による国政介入疑惑で、朴槿恵政権の支持率が急落する中、「アメリカ・ファースト」を主張するトランプ氏の当選は、同盟国である韓国の政治・経済にどのような影響を与えるのか。米ハーバード大学で博士号を取得し、ザ・アジアインスティテュートの所長を務める、慶熙大学のパストリッチ副教授は「朴政権のレームダック(死に体)化とトランプ氏の当選で、韓国に「パーフェクトストーム(未曽有の大嵐)が吹き荒れる恐れがある」と警鐘を鳴らした。
――友人による国政介入疑惑で窮地に陥っている朴槿恵政権について
韓国の歴代政権は、ことごとくスキャンダルに見舞われて任期後半に支持率が低下するが、今回は、そこにいろいろな要素が重なり合っているのが特徴だ。
まずは、今回のスキャンダルで、李明博大統領から続いた保守政権が10年で終わる可能性が高くなった。さらに、歴史を遡れば、1960年に選挙の不正が明らかになって下野した李承晩政権とも類似点が多い。左翼勢力が強く、当時も学生や市民による大規模なデモが発生した。
トランプ氏が次期米大統領に当選したことで、米国は第2次世界大戦後から続いた「世界の警察」の役割を大きく縮小するだろう。経済的には保護貿易主義が一層台頭しそうだ。韓国にとっては、輸出中心のビジネスモデルの行き詰りも意味する。輸出に力を入れて経済を大きく飛躍させた故朴正煕大統領の娘の政権で、輸出主導の経済が大きな転換点を迎えたのは皮肉だ。朴槿恵政権のレームダック(死に体)と相まって、韓国に「パーフェクトストーム」が吹きあれる恐れがある。
――トランプ氏の当選を予想していましたか?
可能性は十分にあると思っていた。2001年9月11日の米同時多発テロ以来、米国はアフガニスタンやイラクで戦争した。今も、シリアなどで問題を抱える。「もう他国に干渉したくない」という心情は十分に理解できる。関係が悪化するロシアとの軍事衝突を心配する米国人が多いと聞く。彼らは「トランプ氏が当選すればロシアとの衝突を当面回避できる」と判断したのではないか。
――今後の日韓関係について
トランプ氏は、米国内の政治を重視するとみられる。そのため、東アジア問題の細部に気を配ることはないだろう。例えば、従軍慰安婦に関する日韓合意に関心を持つとは考えにくい。日韓は今後、両国に横たわる問題を主体的に解決しなければならなくなる。(聞き手 坂部哲生)

<プロフィル>
エマニュエル・パストリッチ:東京大学で修士号、ハーバード大学で博士号をそれぞれ取得。専門は東アジアの古典文学など。著書に「韓国人だけが知らない別の大韓民国:ハーバード大学の博士が見た韓国の可能性)」(21世紀ブックス)などが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