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제 협력 전문가는 문학을 전공해야 한다” (아시아문화와경제 2016년 9월 12일)

아시아문화와경제

“모든 국제 협력 전문가는 문학을 전공해야 한다”

2016년  9월 12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국제 협력 연구에서, 어떤 사람이 외교나 안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 그 역할이 정부 자체에 있든, NGO, 정부, 기업 사이의 국제적 교환과 관련된 광범위한 지식 분야에 있든, 경제학, 개발 정책 또는 국제 협력 연구에 풍부한 경험을 가져야 한다는 가정이 일반적이다.

학부 시절 단 한 과목의 경제학 강좌도 수강하지 않았고 일리노이 대학의 교수가 되어서야 정말로 진지하게 국제 협력을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내가 왜 뒤늦게 국제 협력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되었는지, 그리고 국제 협력 및 외교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해명할 필요성을 느낀다. 실제로 선천적으로 다소 성격이 급한 나는 위의 일반적인 가정에 대하여 반론하고자 한다. 나는 오히려 국제 협력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특히 오늘날,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력에서 몇몇 인문 강좌를 수강해야 할 뿐 아니라 문학 (아니면 예술이나 철학) 분야를 전공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물론 문학 전공이 외교로 향하는 최선의 첫 단계라는 사실이 진실일 수 있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확실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단편적인 충고는 약간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한국과 중국에서나, 또는 이태리나 프랑스에서나, 인문학 전공이 공무원의 해외 근무에 필수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심지어 20세기 초만 해도, 유럽의 경우 라틴과 그리스 전통에 대한 깊은 지식,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중국 고전적 전통에 대한 깊은 지식이 공통점 – 스타벅스나 Economist지에 대한 애착에서 찾기를 바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공통점 – 발견에 필수적이었다. 문학과 철학, 공통의 용어들, 그리고 철학적 과학적 원리에 기반한 그런 공통의 문화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규범의 확립을 도왔다.

이름 바로잡기

국제 협력에서 언어를 다루는 일이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결국 언어의 취급은 문학과 작문 공부에서 배우는 것이다. 이것을 국제 협력에 관한 유명한 전문가, 즉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험프티 덤프티에게서 인용해 보자.

“너를 위한 영광이지!” 험프티 덤프티가 말했다.

“영광이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앨리스가 말했다.

험프티 덤프티는 거만하게 미소 지었다. “당연히 내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모르지. 내 말은 ‘너를 위한 근사하고 압도적인 논쟁’이라는 뜻이야!”

“하지만 ‘영광’이 ‘근사하고 압도적인 논쟁’을 의미하지는 않잖아”, 앨리스가 반박했다.
험프티 덤프티는 약간 경멸조로 말했다. “내가 단어를 사용할 때는,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을 선택했음을 말하는 거야 – 딱 그 뜻이야.”

앨리스가 말했다. “여기서 문제는, 네가 단어를 여러가지 다른 것을 의미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이겠지.”

험프티 덤프티가 말했다, “그 문제는, 어느 의미가 주가 되느냐겠지. 그게 다야”

험프티 덤프티가 여기서 말하고 있고 루이스 캐롤이 우리의 주의를 끌어들이는 본질적 요지는,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는 행동이 정치와 권력의 가장 중요한 행동이며, 그것이 종종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작용하지만(이념적 변화는 본질상 육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의 변화는 가장 깊은 수준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험프티 덤프티는, 단어의 의미를 통제하는 것이 권력의 본질임을 시사한다. 비유해 보자면, 용어의 재정의로 초래된 변화는 핵반응 수준인 반면 일상적 외교에서 초래되는 변화는 화학적 반응 수준으로 발생하며, 보다 가시적이지만 심오함은 덜하다.

“국제연합”, “테러와의 전쟁”, “국제 사회”, “정직한 브로커” 등과 같은 용어에 대한 의미를 정하는 능력은 국제 관계에서 궁극적인 권력이며, 아이러니, 또는 위선과 부정확의 영향에 의해 이러한 용어들이 침해 받거나 약화되는 정도만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용하는 용어로서의 기능이 중지된다. 이 문제는 본질적으로 문학의 문제인 것이다.

공자 또한 어떤 형태든 권력이나 담론에 대한 용어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했고, 관직에 대한 전제 조건인 기술 훈련을 배제할 정도로, 글쓰기는, “wen”(문 文)의 연구가 공자 연구 프로젝트에 매우 중심적이었던 주요 이유가 될 것이다. 공자가 이용한 용어는 “이름 바로잡기”(정명 正名)였으며, 그는 사람, 제도 및 관습을 기술하기 위해 이용되는 용어를 정확히 하는 것(정명 正名)이, 가난한 사람을 먹이는 박애나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특정 행위보다, 평화를 유지하고 세상을 공정하게 만드는 데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공자는 “이름 바로잡기”로 무엇을 의미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사상과 현대의 관련성은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으로, 나는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는 심각한 문제의 대부분이, 우리가 일상의 말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원래 의미와 그들이 실세계에서 묘사하기 위해 이용되는 물체의 실제 성질 사이에 심각하게 커져가는 갭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는 이 갭이 우리가 부딪치는 가장 도덕적인 문제를 규정하며 공자의 접근이 상당히 실제적으로 우리가 실행 가능한 해결책에 도달하도록 돕는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에 우리의 일상 생활에 중심적인 몇 가지 용어의 예가 있지만 그 의미는 지난 20년에 걸쳐 상당히 변했다:
“은행”, “기업”, “정부”, “프라이버시”, “재산”, “군대”,“지능”
이러한 용어들의 의미 변화는 우리 불행의 원천이다. 그 의미들이 변하지 않았다면 사태가 이전 방식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느낌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기능하지 않는 제도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많은 좌절과, 윤리의 결핍 인지나 현대 세계의 잔인성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제도와 실제 제도 사이의 갭과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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