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부가 한국을 주도할 수 있다면?” 프레시안

프레시안

2018년 7월 31일

“환경부가 한국을 주도할 수 있다면?”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지난 11년 동안 나는 환경부와 직접 협력해 일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2008년 당시 내가 살던 대전시의 미래를 위한 제안서를 작성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2008년 1월 ‘대덕넷’에 게재된 ‘대전은 세계경제 이끌 첨단 환경도시’의 초안을 작성할 당시 한국 핵융합 연구소 연구원 한정훈 박사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그 제안서에서는 대덕 연구단지의 과학 전문가들과 대전시의 협력을 촉구했고, 이는 ‘대전 환경 포럼'(나중에 ‘대전 녹색 성장 포럼’으로 변경)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포럼은 시민들과 정부 공무원 및 과학 전문가들이 한 데 모여 대전을 생태 도시로 진화시킬 방법을 논의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 포럼이 언론을 통해 언급되기는 했지만, 자동차에 기반한 도시 문화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내가 만난 환경부 관리들은 친기업적인 이명박 정부가 건설사들을 통해 진행하는 파괴적 행위들이 실제로는 환경에 이롭지 않음에도 환경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뻔뻔하게 홍보해야만 하는 매우 고통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나는 한국의 시민들이 보호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던 환경부에서 도움이 되기를 원했던 관리들에게는 예산이 지원되지 않았고, 부동산업자와 개발업자들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온 ‘4대강 프로젝트’에 따라 자연 하천에 대한 콘크리트 제방과 골프장을 홍보하도록 강요받았던 관리들에게는 예산이 지원되었음을 목격했습니다.

따라서 환경부의 고위 공무원 150여 명을 대상으로 나의 저서 <한국인만 몰랐던 더 큰 대한민국>(레드우드 펴냄)에서 제시한 한국 경제의 재고를 주제로 한 강연에 초청한다는 이메일을 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김은경 현 환경부 장관은 사회 및 환경 문제를 다루는 활동가로서 오랜 세월을 보냈고, 지방 정부에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김 장관이 산업화에 집착하는 한국 사회에서 환경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내 저서를 읽은 김 장관은 외국인이 와서 보다 큰 환경 정책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번 행사가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강연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세종시에 있는 환경부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번 여행 자체는 환경 친화적인 한국을 만들기 위해서 갈 길이 매우 멀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세종시에는 기차역이 없습니다.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자동차 에어컨을 세게 튼 채로 대기를 오염시키면서 시골을 가로질러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낭비적인 생활양식 장려가 주목적인 아파트 단지 건설을 위해 나무들이 베어지고 토양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환경부가 위치한 곳은 기후에 대한 장기적인 영향에 대한 우려가 거의 없는 내부로 외부와는 차단된 뱀 모양의 정부 청사 건물 안에 있습니다. 강한 에어컨 덕에 재킷과 넥타이를 착용하고 강연하는 데도 매우 쾌적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전기는 태양열 발전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기후변화’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환경 문제를 다루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묘사한 포스터가 있었습니다. 수년간 어설펐던 환경 정책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들 사이에서 변화에 대한 진정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번 행사와 관련해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내 연설은 매우 직설적이었고, 지난 80년간 한국에서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왔던 산업화 사회가 매우 심각한 위험에 빠져들었음을 암시했습니다.

석유와 석탄의 수입을 중단하는 한편, 모든 정부 정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유무역 이데올로기에 반하므로 농산물 수입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화석 연료를 홍보하는 기업들의 방송 지원이 기후변화에 관한 보도를 위험하게 왜곡하므로, 이들 기업의 TV 광고를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런 연설은 매우 큰 논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의견 차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어떤 적개심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나는 기후변화에 관한 이 정직한 대화에서 진정한 열정을 느꼈습니다.

나의 발언이 끝난 후 한 관리가 “미국이나 중국, 일본에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한국을 선택했습니까?”라고, 종종 받았던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국에 온 이유는 K-POP이나 김치 또는 갈비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며, 오히려 과거 한국 정부의 전통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정치 및 경제의 장기 지속성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전에도 이런 대답을 했지만, 말한 후 그 질문에 대한 보다 정확한 답이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일본과 중국 환경부, 특히 기후변화에 대한 논의조차 금지되어있는 나의 모국인 미국의 환경부였다면 이런 연설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환경운동가 그룹뿐만 아니라 실제로 정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나의 신랄하고 더 나아가 혁명적일 수도 있는 발언이 공식적인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은 결코 기적이 아닙니다.

그곳에서는 나의 발언을 검열하려는 어떠한 시도나 내가 발언한 내용을 담은 복사물을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배포하는 것을 주저하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지난 3주 동안 각각 별도의 프로그램에 따라 군대의 모든 지부에서 나온 장교들을 대상으로 한 네 번의 강연에서도 환경부에서 겪었던 것과 유사한 놀라움을 경험했습니다. 소령급 및 대령급 장교 앞에서 나는 기후변화, 사회의 파편화, 반(反)지성주의의 확산과 같이 최근 대두되고 있는 위협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했습니다.

내가 11년 동안 한국에 머물렀던 진정한 이유는 이런 한국 주류사회의 개방성에 있습니다. 때로는 한국 정부의 정책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최고 수준에서 솔직히 토론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투쟁은 이제 막 시작 단계에 불과하므로, 제도적•문명적 재앙에 직면한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전기 사용과 환경 문제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석탄 및 석유 연소를 통한 전력 발전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상 이변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긴 투쟁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기후변화에 대응할 도덕적 책임에 대해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실패할 것인가”라고 언급했던 불교 철학자 스티븐 젠킨슨 (Stephen Jenkinson)의 발언을 상기하곤 합니다. 이번 환경부 강연을 통해 적어도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음은 지난 7월 27일 환경부 강연 내용입니다.

대한민국을 끌어나갈 미래의 환경부

 

오늘 강연을 하나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리고 제시되는 질문이 여러분들의 상상력에 자극이 되길 바라며, 저 또한 마음껏 자유롭게 답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물론 제가 말하는 답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생각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생각은 객관적으로 검증된 과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국의 미래를 그려봤을 때, 앞으로 충분히 실현 가능한 주장(비전 제시)이 될 것입니다.

질문은 즉, ‘환경부가 최대, 최고의 정부기관으로 자리 잡으려면 한국에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사고방식에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정도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정부의 정책들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더욱 더 과학적 원칙에 입각해서 개발되어야 합니다. 그동안은 제가 볼 때, 다분히 감정적인 여론의 반응과 과대광고 등의 야단법석 속에서 애매모호하고 무책임한 방식에 의존해왔던 경향이 많았다고 봅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 재앙에 가까운 기후변화의 환경 속에 이미 들어섰습니다. 이 거대 재앙에 맞서 대응하기 위한 부처로서 지금 환경부의 구조와 역할과 역량이 지극히 미약하다는 것은 여러분 모두가 긍정할 것으로 믿습니다. 문제의 본질과 현실을 자각하고 실질적 대응을 위한다면, 국가의 보유 자원과 노력을 환경부에 집중시켜서 경제와 문화 전체를 구조조정하고 이 과정에서 다른 정부부처 간 활동을 조율하는 중앙기관으로 승격하여 기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한 과정에서 인정해야 할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쉽게 긍정하지 않으려는 부류도 있겠지만, 그것을 부정할 근거 역시도 없는 사안입니다.

우선, ‘진실’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과학적 조사를 통해서 입증되므로 투표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진실’이 있을 경우에는 오롯이 ‘진실’ 그 자체로 드러나며 자각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때문에 심각한 기후변화 문제를 두고 대중들이 알아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투표로 결정할 일이 아니듯, 기후변화 심각성의 ‘진실’을 우리가 모두 깨닫는 데에는 그 어떤 방해와 장애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의 현실에서는 기업의 광고와 후원으로 연명하는 미디어부터도 이 사안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덜 벗겨진 ‘진실’의 영향으로 대중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해서 환경부나 정부의 행동에 제약이 따라서는 결코 안 되겠지요. 정부는 진실 추구와 우리 사회 개선을 위한 정책 개발 및 이행을 임무로 하는 기관입니다. 이 임무를 위해서는 타락한 제도가 전파하는 잘못된 관념에 맞설 용기가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해서 이를 피할 것이 아니라 더욱 전면에 나서서 기꺼이 할 일을 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강한 정부가 있어야 할 것이며, 강한 정부 안에는 윤리의식과 책임감으로 무장된 지식인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국가의 건전성을 담보하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민주주의는 강한 정부를 만들어 가는데 효과적인 힘이 되어주지만, 만약에 이러한 강력한 정부가 의미 있는 시민 교육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진실한 언론 보도를 지원하지 않게 된다면, 본능적 포퓰리즘에 휩쓸려 전체주의 정부로 변질될 우려도 생깁니다.

강한 정부란 기업 규제와 과세를 추진하는 정부, 국민건강과 환경에 긴밀히 연관된 기업과 재벌들의 활동내역 공개를 요구할 줄 아는 정부입니다. 그리고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으며 국가에 이익이 되는 방향을 평가하고, 일반 시민과 전문가 그리고 정부 관료가 함께 참여하는 진지한 대화의 장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여 당면한 시대적 과업들을 해결해 나아갈 장기 계획을 수립할 줄 아는 정부를 말합니다.

향후 한국 정부의 미래를 구상해 볼 때면 우리는 서구 모델(미국식 선례)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한국의 뛰어난 전통적 거버넌스를 지금 우리 시대에 맞게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삼림과 토양을 보호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생태계를 보존하는 규정과 관행 그리고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통적 거버넌스를 되살리는 일은 우리의 생활환경과 생태계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큰 과제입니다. 한국의 과거 속에서 우리는 정부 관료가 대중매체나 주식시장에 연연하지 않고 윤리원칙에 따라서 ‘100년 대계’를 구상하던 긴 안목의 시절이 분명히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지금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강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공개 민간기업의 단기 수익을 위해 계획을 수립하고, 부패한 미디어를 이용해 마치 인정받은 사실인 양 이를 홍보하는 것이 관행이 될 정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만약에 과거의 역사 속 관료들이 이런 행태들을 봤다면 분명히 큰 충격 속에 빠졌을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이제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모두 현재의 방식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깨닫고 하루속히 현세대의 혼란과 착각을 유도하는 방해물을 떨쳐내야 할 때입니다. 물론 옛 방식이 모두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여성들의 능력 경시, 편협한 시각, 경직된 신분과 계급제도는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화성인이 지구에 와서 200년 전 조상들 삶의 방식과 지금의 우리를 비교한다면, 비록 우리가 세련된 옷을 입고 스타벅스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지금 우리 모습이 훨씬 좋다고만 평가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큰 변화의 꼭짓점에 놓여있는지도 모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장해온 글로벌 경제체제가 완전히 붕괴하고, 한국이 신성시하는 자유무역체제가 종식될 수도 있는 최고의 위기가 목전에 다가와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1960년과 흡사한 경제, 문화, 정치 위기가 진행 중입니다. 어쩌면 1960년보다 안 좋은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1960년에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국민들이 많았고 북한과의 대립으로 사회 전체가 두려움 속에 쌓여 경직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책을 읽으며 의미 있는 지적 토론에 일상적으로 참여할 줄 아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지금보다 높았으며, 유기농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중도 안정적 수준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우리를 위한’ 변화는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될까요? 변화가 가장 먼저 시작되는 곳은 소수의 지식인 집단입니다. 이들은 체제가 강요하는 인위적 목표달성을 의무로 받아들이지 않고, 동료나 평범한 시민들을 의미 있는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이며 장기적 관점에서 정책을 개발하기 위해 그동안 자신이 축적한 학식과 전문성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공공의 교육일선에 선 교사와 교수들 그리고 공무원들로부터 시도된다면, 대규모 민중시위와는 달리 지속성을 담보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세종대왕과 정조대왕, 이후 수많은 사회개혁을 위한 노력의 선봉에 바로 그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동안 전통적 유교와 도교, 불교의 가치와 한국의 전통 거버넌스 모델은 지속 가능한 한국을 구축하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 가치를 또다시 드높인다면, 낭비를 일삼는 소비문화와 식욕, 성욕 자극에만 집중된 반(反)지성적 문화를 끝맺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과 가족, 그리고 모든 시민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역할에 모두가 동참해야 하며, 그 노력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늘 새로운 것을 찾는 변덕스러운 소비주의 덕분에 한옥마을 등을 통해서 한국의 전통문화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비주의에 입각한 전통문화의 재조명은, 소비에 의존한 경제구조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는 전통 거버넌스의 근본 전제와 대립하게 됩니다. 전통 거버넌스에 따른 경제는 본질적으로 윤리적 성격을 갖습니다. 20세기 초 한국이 받아들인 일본식 경제학은 한국 국민의 경제 개념을 본질적으로 손상시켰고, 이후에 윤리적 파탄에 빠진 미국식 자유시장경제가 밀고 들어오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경제’라는 말은 본래 ‘경세제민(經世濟民 : 세사(世事)를 다스려 도탄(塗炭)에 빠진 백성(百姓)을 구(求)함)’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하지만 19세기에 일본은 윤리원칙을 무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계적으로 수익을 추구하는 개별영역으로 ‘경제(けいざい(케이자이))’로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경제에 대한 개념은 아직도 한국과 일본인의 사고구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단기수익에 매진하게 되고, 또 그 수익은 증시에 반영되게 됩니다. 개인이 증시에서 엄청난 수익을 얻게 될 경우에는, 그 개인이 자발적으로 환경, 사회 NGO단체에 기부를 할 경우에 그에게 감사를 표시할 줄만 알 뿐, 우리 사회는 그가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메커니즘에 관하여 규제나 비판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지는 못합니다.

파탄에 도달한 근시안적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반드시 ‘좌파적’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두고 좌파로 생각하지 않으며, 저의 비판적 시각은 오히려 보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개념에 대해 논해서 미안합니다만, 이것은 가볍게 꺼낸 얘기도 아니며 그렇다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흥미를 유도하려는 의도에서도 아닙니다. 사실, 민주주의는 절망적일 정도로 애매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유익한 만큼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쉬운 개념입니다. 만약에 투명하고 깨끗한 직선제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민주주의는 건전한 거버넌스를 보장하는 데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자체는 목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수단이며, 그나마도 깊은 한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의 인기와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한 선거가 얼마나 전체주의로 쉽게 변질되어 가는지를 우리는 과거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용기와 도덕적 사명감으로 무장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저 없이 나서는 지식인 집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진실은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자각하고 믿더라도 진실은 진실일 뿐입니다. 현 제도는 여론만을 중시하지만, 여론은 편향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설령 일반 시민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여론이라고 하더라도 타락한 언론 미디어가 주입한 왜곡된 세계관의 영향 하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여론은 민주주의와 하등 상관이 없으며, 현 질서를 옹호하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는 믿음을 퍼뜨려 진실한 대안적 의견을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변질시킵니다.

따라서 뉴스는 ‘이것이 여론’이라고 내세울 것이 아니라, 과학적 원칙을 바탕으로 현 상황을 분석하고 지방정부와 입법부, 기업을 비롯한 제도와 기관이 실제 어떻게 운영되는지의 상세한 내용을 시민에게 제공하는데 충실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미디어는 이런 역할을 전혀 수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시민들은 스스로 지적 욕구를 높이고, 시민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관심사들에 대한 주의 집중력을 더욱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평범한 일반 시민들은 제대로 된 정책 논의에 참여할 만한 정보 보유와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전제는 이들의 의견을 경시하며 정부를 권위적으로 만들기 위한 부정직한 수단으로 흔히 이용됩니다. 정부가 걸핏하면 내세우는 ‘브랜딩’과 ‘마케팅’, ‘서비스’, ‘여론’ 등은 개념들의 사실적 적용 여부와 현실성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단기 수익에 치중한 기업형 모델은 절대로 정부의 목표가 되어선 안 됩니다.

지금 대학의 지식인들은 영리기업이 운영하는 학술지를 위해 현실에 적용될 일이 없는 논문을 생산하는 노예로 전락한 듯합니다. 이들 지식-노예들이 시민이나 정부 관료와 함께 협업하는 통로는 공개적으로 차단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이들의 전문성을 활용할 길이 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우리는 합리성을 내세워서 지방 대학을 폐교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학을 근로자 생산공장으로만 여기게 될 때 내릴 수 있는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학을 줄여나가다 보면 지방에서는 복잡다단한 변화의 여파를 시민에게 설명해줄 지식인들이 그곳에서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재난에 가까울 정도이며, 이런 반-지성적 흐름은 전 세계에서 파시즘적 포퓰리즘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원인이 되어왔습니다.

정부 관료는 (홍보업체가 주장하는 ‘혁신 캠페인’이 아닌) 진정한 변화를 이끌 지식인 집단의 중요한 한 축입니다. 그러나 지금 정부는 정책 수립과 제정을 위한 역량을 상실한 듯합니다. 헌법에 따를 때 시민들이 대표를 뽑으면 관료들은 시민과 이들 선출 대표와의 대화 속에서 불거진 요구사항을 집어내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정책을 수립해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구조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요즈음의 정책은 싱크탱크나 로펌, 혹은 컨설팅업체를 통해 불투명한 과정을 거쳐 완성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들 협력기관들은 직, 간접적으로 영리기업의 통제를 받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정부의 기능을 무시하고 정부를 소외시키는 요즈음의 정책 입안 과정은 위헌의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정당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헌법에 따라 국회 내부에서 정책과 법안을 만들지 않고, 불투명한 방식으로 정당의 닫힌 문 안에서 비밀스럽게 정책을 만듭니다. 그럼에도 이런 위험한 흐름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정부는 내부적 전문성을 갖추어야 하며, 더구나 공무원은 필요한 전문가가 되기 위한 지성 계발의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만약에 정부 스스로가 30개년 계획과 같은 계획을 수립하고 이행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장차 국제투자은행의 공격이 들어올 시에 이를 상대할 수가 없게 됩니다. 게다가 증시에 매여있는 기업들이 장기적 계획을 세울 수 없음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정부의 부패와 정책상의 오류를 비판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은 당연히 학계와 NGO의 몫이라고 봅니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정부의 파트너로 일하는 유명 싱크탱크를 설립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업활동으로 엄청난 수익을 낸 부자들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 소위 싱크탱크가 가진 이해관계가 너무도 노골적이지만, 우리는 20세기 이전의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정부가 국익을 위해서 자체 분석과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역량을 다시금 습득하는 데에는 전혀 힘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은 그 뿌리를 반드시 되찾아야 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환경부가 진짜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까요? 우선, 문제 기업에 벌금을 부과하고 석탄과 석유에 중과세하는 한편, 30~50년 장기 상환 차관을 통해서 풍력과 태양발전 등의 신재생에너지 비용부터 낮춰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검약함과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전통을 되살리고, 과소비를 부추기며 필요하지도 않고 환경과 스스로에게 해악이 되는 물건을 사야만 행복해진다는 광고 속 위험한 생각을 영원히 폐기해야 합니다.

고성장 모델의 명과 암

한번은 1960년의 혁명을 주제로 한 한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회의 자리에는 70대 이상의 원로들이 나와서 당시 자신의 경험들을 말씀하셨답니다. 이 원로들은 한국이 이룬 민주화와 산업화를 자랑스러워하며 술회하는 모습들이 공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한국은 그 두 분야에서 올바른 방향을 향해 달려오며 여기까지 도달해온 것일까요? 선거는 분명 이전보다는 공정해졌지만, 정당 참여도는 감소했으며 지역사회는 붕괴한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지역사회가 한자리에 모여 지역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도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생산공장과 낭비를 조장하는 쇼핑몰과 고속도로 등 투자은행의 필요에 따라서 진짜 수요치를 무시하고 무분별하게 세워진 아파트 단지들로만 넘쳐나고 있습니다. 진작부터 통제 수준을 벗어난 산업정책의 결과물들이 이미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저는 1960년부터 시작된 고성장 정책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시민 참여를 통한 통합적 방식으로 사회 전반을 빠르게 변혁시킬 수 있었습니다.

국가를 위한 장기적 개발계획이 수립됐으며,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곳으로 자본이 집중되었습니다. 부패한 개인이나 일부 부유층의 이익 때문에 새로운 한국을 만들려는 강력한 정책 방향이 흔들리는 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은 개발 노력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이들의 교육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정부의 자금 통제 또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 정부는 외국 투자자본 유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국내자본의 육성에 나섰습니다. 그것은 미국과 일본이 벌이는 ‘경제 장기판의 졸’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국영은행과 정부기관 역시도 장기 목표에 충실하기 위해 자본을 통제했습니다. 민간의 해외송금을 금지하고 저축을 권장한 덕에 실질적인 국내자본이 축적될 수 있었습니다. 억압적이고 반(反)민주적인 정책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국 국민이 아닌 사람의 관점에서 본다면 올바른 방향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때문에 곧 다가올 글로벌 금융체제 붕괴에 대비하려면, 지금이라도 빨리 그와 같은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어쨌든 1960~70년대 한국은 특정 산업에 자본을 집중시킬 수 있었고 눈앞의 이익에 매몰되지 않고 장기적 관점으로 정책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전문가들 또한 국가가 정하는 우선순위 사업에 충실하며 자기 몫을 해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성장 정책은 엄청난 오해를 전제로 하고 있고, 이는 지금까지도 우리를 괴롭히는 망령이 되었습니다. 우선, 이들 정책은 자유무역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믿었으며, (한국의 전통가치와 상반되는) 낭비적 소비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석탄과 석유, 철강을 수입해서 완성품을 미국에 수출하는 정책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 믿었고, 수입과 수출에 대한 높은 의존이 부채로 전환될 가능성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소비사회가 환경을 어떻게 파괴하고 사회를 어떻게 분열시킬 것인지, 뿌리 깊은 소외와 강박적 행동이 지적 논의의 싹을 어떻게 잘라 버릴지도 역시 몰랐습니다.

민주주의 자체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냉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기와 윤리적 의무감을 가지고 현실 속 문제를 해결하고 시민이 세상을 좀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지식인층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빠르게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도 있음을 저는 경고하고자 합니다.

진정한 환경부로 거듭나기 위하여

환경부가 어떤 제재나 방해도 받지 않고 대기업의 부정한 이익을 대변할 필요 없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해 보도록 합니다. 저는 석탄과 석유의 소비 근절을 위한 5개년 계획에 기업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고, 석탄, 석유에 높은 세금을 부과해서 얻은 돈을 재생가능 에너지에 지출하고, 50개년 에너지 개발정책의 수립과 이행을 위해서 (가능하면 국영화된) 은행을 통해 30~50년 상환 저금리 대출을 제공해 풍력과 태양 에너지 발전의 비용을 낮추는 미래가 언젠가는 현실로 가다 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서 궁극적으로 더욱 중요한 요소는 기술이나 에너지보다는 바로 문화입니다. 우리는 한국 전통가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절약과 중용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재발견해내야 합니다. 청년들이 일회용 컵을 쉽게 버리는 행동을 서로가 부끄럽게 여길 수 있도록 하며, 일상에서 내리는 스스로의 결정 하나하나가 모든 생태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또한 성장을 위해선 소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근시안적 주장의 거짓을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하며, 사람들이 필요하지도 않고 환경에 해로운 물건을 구매하는데 자신의 인생을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도록 깨달아야 합니다.

정부의 경우에는, 국익에 위해가 되는 기업의 증시 성과나 해외 매출에 신경 쓰느라고 정작, 중요한 장기적 우선순위를 설정하여 정책 이행에 일관성을 확보하는 정부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정부가 도덕적 의무감을 갖춘 일단의 학자들을 모아 현재 정책이 향후 50년간 한국에 미칠 영향을 평가하고 이들로부터 30~50년에 걸친 장기 국가계획에 대한 생각을 듣는다면, 한국의 경제개발 정책이 어떤 변화를 겪게 될 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들 전문가가 기후변화와 부의 집중을 완화하고 시민을 위해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석유 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보조금으로 지출하고 시민의 주체적 사고력을 저하시키는 전자기기를 개발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주지시킨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질문 같습니다. 지금은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 가능한 환경과 경제적 평등 확대처럼 진짜 중요한 사안에는 기존 대형 프로젝트에 투입하고 남은 아주 적은 예산만 편성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 도덕적 전문가들에 의해서 아마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겠지요?

정부는 기업자본의 국내 흐름을 전략적으로 통제하는 한편, 앞으로 윤리적 원칙에 입각한 현실 정책을 제시할 지식인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현재 한국에는 장기적 정책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싱크탱크나 정치인들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기후변화라는 재난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들에게는 진실이나 도덕에 충실해야 할 어떤 의무감도 느껴지지 않나 봅니다.

미디어는 피라미드식 경제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급급해 석유와 철, 석탄 등의 원자재 수입을 요구하고, 환경 보호나 농업경제 진흥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자유무역의 장벽이기 때문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장애물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학계에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끼치는 정신적 해악을 무시한 채 납세자의 소중한 돈을 써서라도 자동차와 선박, 반도체, 스마트폰 등을 인위적으로 부양하자고 주장하고 낭비적 소비문화를 권장하는 논문들이 지속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결과로만 근거해서 정책이 만들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제는 불편하지만 위험한 진실이 더 이상 감춰져선 안 되며 모두가 알아야 하고, 강력한 대안과 실질적인 규제방안들을 수립할 수 있는 과단성 있는 준비를 시작할 때입니다.

석유기업은 이해 상충 문제로 시민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접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기 때문에 TV나 라디오의 광고주가 될 수 없도록 정부가 규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동차 광고를 금지하는 일도 가능할 것입니다. 낭비를 조장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자동차가 환경을 파괴하고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낳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생기는 엄청난 쓰레기의 양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같은 문제로, 정부는 플라스틱 사용을 전면 금지하거나 생분해나 재활용 가능한 부품으로 분해되지 않는 제품의 판매를 금지시킬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정부에 대한 이런 기대가 비현실적인 환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 뜻을 모아 혁명적 방향 선회를 하고 이를 통해 성공적 정책을 만들어낸 사례는 우리의 역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대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윤리적 의무감과 대담함이 필요하며, 전문지식을 갖춘 정부 관료와 지식인이 함께 앞장을 서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 위기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정부의 기능이 약화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포르노에 가까운 이미지에 노출되고, TV는 소외된 이웃이나 사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부자들이 누리는 이기적이고 향락적인 삶과 아무 생각 없는 ‘먹방’으로 가득하기만 합니다.

이번 지방선거에도 역시나 정치인들은 유권자와 찍은 귀여운 셀카를 SNS에 올리거나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골목에서 춤을 추는 운동원들을 고용했습니다. 이런 식의 선거는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를 만드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 의무를 진 청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정부관료 육성 시스템을 구축해서 한국의 미래에 헌신하려는 차세대들이 기성세대가 무시한 정책 개발 과정에서 실질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기회와 여건을 만들어 줍시다. 전반적 방향을 그렇게 잡고 지식인이 주어진 사회적 책무를 다하게 만들어야 우리는 이번 위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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