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한국어

“스마트폰 개발보다 더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한국” 다른 백년

다른 백년

“스마트폰 개발보다 더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한국”

2017년 9월 18일

페스트라이쉬 임마누엘

 

 

지난 한달 동안 핵무기 이야기만 듣다 보니까 핵무기만이 유일한 위험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오지는 않지만 훨씬 더 위험한 문제가 동시에 우리 눈앞에 다가와 있다.

초여름, 유례없는 가뭄으로 농사가 큰 피해를 입고 저수지는 바짝 말랐다는 기사가 신문을 뒤덮었다. 기상청에 따르면 5월 총 강수량은 161.1밀리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1973년 측정을 시작한 이후 두 번째로 낮은 기록이다.

그러나 가뭄과 기후변화를 연결 짓는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동북아시아 사막화 현상과 관계있다는 언급 또한 없었다. 실지로 아시아 지역에서는 사막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전망은 좋지 않다. Read more of this post

중앙일보 서평

중앙일보

서평

더 큰 대한민국

손민호

2017년 8월 25일

한국인만 몰랐던 

더 큰 대한민국이 만열 지음레드우드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한국인보다 한국에 더 자부심을 느끼는 외국인이다. 여러 저작을 통해 한국 문화의 가치와 잠재력을 역설한 그가 이번에는 한국인 이름 ‘이만열’로 한국 사회를 통찰하는 책을 썼다. 『한국인만 몰랐던 더 큰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에서 3년 전에 펴낸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의 연장선이자 확장판이라는 책의 의의가 가늠된다.

 책에서 놀랐던 대목은 이 교수와 한국 사회의 거리다. 이 교수는 외국인의 시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우리 사회 깊숙이에 들어와 우리의 내밀한 곳을 후벼 판다. 이를테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이들이 부당하게 갈취한 금액은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에 쏟아부은 22조 원이나 자원 외교에 낭비한 수십조 원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23쪽)’와 같은 진단은, 숨기고 싶은 상처를 들키고 만 것처럼 창피하고 아프다.

이 교수의 남다른 시선은 예리하고 깊이 있는 분석이 아니라 이 교수의 자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교수는 기꺼이 관찰자의 자리를 이탈해 내부자의 자리로 들어온다. ‘우리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정보에 기반한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63쪽)’며 한국적 저널리즘의 수립을 주장할 때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는 한국에 정착한 지 10년째인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 여성과 가정을 꾸린 이만열이라는 한국 사회의 내부자다.
그렇다고 이 교수가 한국을 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방에 텀블러를 넣고 다니는 이 교수에게 일회용품 낭비를 부추기는 한국의 카페 문화는 끔찍하다. 성형수술을 한국의 주요 관광상품으로 육성하자는 움직임은 심오한 정신세계를 구축한 한국 문화의 뿌리를 흔드는 일이라고 꾸짖기도 한다. 읽고 보니 싫은 소리투성이다. 그래도 기분 나쁘지는 않다.

“문재인, 오바마처럼 되지 않을까” 다른 백년

다른 백년

“문재인, 오바마처럼 되지 않을까”

2017년 8월 21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한국 신문에는 독자가 별 관심이 없는 시시콜콜한 내용이 가득하다. 최근 UN에서 북한을 제재하기 위해 각 국의 외교관과 정치가의 일거수 일투족을 중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어느 누구도 그런 제재가 북한의 핵 개발을 멈추게 할 거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한국 언론은 독자들에게 나라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를 알리는 기능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환상의 공간’이 된 것 같다. 대신 오해와 혼란만을 야기하는 것 같다.

이러한 언론의 타락은 사람들을 장님으로 만들고, 북핵보다 더 위험한 위협이 되고 있다. 보수매체든, 진보매체든 마찬가지이다.

북한에 대한 UN의 제재를 다룬 신문들은 국제사회의 이면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는다. 동아시아에는 미사일 실험과 소요에 관한 협약이 없기 때문에 국제법상 미사일 발사는 불법이 아니라는 사실은 지적되지 않는다. 또 북핵을 핑계로 중국, 미국, 일본, 한국이 핵무기 경쟁을 할 위험성을 지적하는 신문도 좀처럼 볼 수 없다.

결국 가장 중요한 뉴스가 빠져 있는 것이다.

  Read more of this post

“신에너지 패러다임 전쟁” 경향신문  

경향신문

2017년 8월 8일

“신에너지 패러다임 전쟁”

임마누에 페스트라이쉬

 

중국 정부가 베이징에서 화석연료 택시 사용을 단계적으로 중단하고 전기차를 대대적으로 도입한다는 정책 발표를 했다. 그러나 이 뉴스는 북한 핵무기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에 묻히고 말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행정동 앞에 수년간 쓸쓸하게 서 있던 전기차 1대가 생각난다. 한국은 아직도 전기차 전면 도입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관계를 걱정하는 동안, 중국은 2020년까지 재생가능 에너지 3600억달러 투자를 공표하고, 태양에너지·풍력 발전 및 개발산업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달려가는 중이다.

한국에서는 스마트폰 생산과 자동차 수출만 늘리면 경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 경제·기술 분야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그야말로 기념비적이다. 한국이 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안이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미디어 또한 솔직하지 못하며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일단 역사적 시각에서 지금의 경제 전환을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대영제국에 무역대국의 자리를 물려주기 전만 해도 경제 규모나 수준에서 가장 앞섰던 국가는 중국이었다. 중국의 번영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주효했던 요소는 대규모 식량의 효율적 생산이었다. 1830년대 이전만 해도 각국이 활용 가능했던 에너지는 사람과 동물의 육체노동뿐이었다. 다시 말해, 광합성으로 전환된 태양에너지는 식량의 농업적 생산을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었다.

중국은 장기적 농업정책에서도 크게 앞서 있었다. 전국적 수리(水理) 관개(灌漑) 제도 확충과 노련한 운용 정책은 그중에서도 최고였다. 그러나 19세기 영국(을 선두로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 석탄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경제가 시작됐다. 석탄은 목재나 육체노동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제공했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을 가동시켰다. 중국의 에너지 시스템은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석탄으로 얻은 화력이 군수산업에 도입되면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은 아편전쟁에서 능욕을 당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석탄경제 또한 영원할 수는 없었다. 20세기 초반 석탄보다 훨씬 효율적인 또 다른 화석연료, 석유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Read more of this post

“수학이 다스리는 나라 대한민국” (중앙일보2017년 6월 24일)

중앙일보

“수학이 다스리는 나라 대한민국”

2017년 6월 24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나는 우리 학생들이 미래를 걱정하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몹시 가슴 아프다. 나를 안타깝게 만드는 것은 단지 그들이 좋은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만은 아니다. 학생들은 일상의 표면 아래에 감춰진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와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다고 느낀다. 한국 사회는 그들 모두가 인간으로서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일단 숫자로 변환된다. 숫자로 순위를 매긴 다음에야 어떤 일의 가치가 인정받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게 마치 위반하면 안 되는 법칙처럼 돼 버렸다. 한데 랭킹은 우리의 일상적 체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어떤 객관적인 기준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만 한다.

숫자가 다스리는 나라인 한국에서 사는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에 그들이 주변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들이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의 문화와 조직에 어떻게 공헌하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수학적인 방정식을 동원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예컨대 우리는 ‘몇 개의 IT 기기를 팔았는가’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 논문을 몇 편이나 썼는가’ ‘몇 대의 자동차를 점검했는가’와 같은 질문을 한다.

수학은 한국에서 가치를 매기는 최종적 결정권자가 됐다. 그 어떤 공헌도 양적으로 가늠할 수 없으면 인정되지 않는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한국 사회에 내재돼 있는 끔찍한 ‘폭력’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지극히 복합적인 인간의 체험, 식구들이나 공동체 혹은 자연 세계와 ‘나’라는 개인 사이에 벌어지는 본질적으로 미묘하면서도 다차원적인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랭킹으로 단순화돼 표현된다. 랭킹이라는 단일한 숫자는 어떤 개인이나 조직, 심지어 나라 전체의 가치를 표시한다.

이처럼 인위적인 방식으로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가치를 수리적으로 바꿔놓으려는 욕구의 원천은 무엇일까. 한국인들이 다른 한국인을 판단하도록 내버려두면, 필연적으로 부패가 끼어든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패를 차단하려면 수학적인 평가라는 보다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체험에 대한 이러한 2차원적인 접근법은 인간 체험을 ‘평준화’시켜 버린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공허함이 남는다.

교수로서 나는 교수진에 대한 평가가 좁은 범위의 학술지에 몇 개의 논문을 냈느냐로 평가된다는 사실이 놀랍다. 교수들이 쓰는 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전혀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이 멘토•동료•시민•작가 혹은 철학자로서 어떤 일을 하는지는 관심 밖이다. 몇 편의 학술지 논문을 썼는지는 컴퓨터로 쉽게 셀 수 있다. 하지만 글을 포함해 어떤 교수가 하는 일들의 중요성과 의미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일들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들뿐이다.

우리 학생들이 처한 상황은 훨씬 나쁘다. 그들의 복합적인 개인 체험은 일자리에 지원하는 과정에서 ‘스펙(specs)’이라는 묶음으로 변환된다. 마늘이 마늘 으깨는 기구에 겪게 될 운명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다. 비극은 단지 학생들에게 돌아갈 일자리 수가 충분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젊은이들을 저마다의 존재 자체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비극이다. 그들이 척도에서 차지하는 숫자를 묻는 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당신에게는 어떤 것들이 근본적인 가치입니까’를 물어야 한다.

사람의 가치를 이해하는 복합적이고 뉘앙스가 있는 방식을 찾아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사람을 화폐 단위로 정의하지 않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모든 사람의 체험과 공헌을 온전히 평가하려면 사람들 사이에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인식론적 질서에서 꼭대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경제다. 경제는 그저 국내총생산(GDP)이나 이자율이나 수출 같은 숫자로 정의될 뿐이다. 그다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기술이다. 하지만 기술의 중요성을 보여줄 때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매출이나 이윤이다. 역시 숫자다. 기술이 사회에 실제로 미치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은 중시되지 않는다.

문화는 ‘질서 더미’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문화는 개인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활동이나 주말에 긴장을 푸는 휴식 정도로 인식된다. 문화는 우리를 궁극적으로 정의한다. 문화는 우리의 가치를 설정하며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가 통계에 집중하면서 미묘하거나 섬세하거나 어떤 때에는 모호하기까지 한 문화의 본질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더 빨리 갈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진로의 대한 통제력은 상실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왜 거기로 가는지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Read more of this post

“한국인은 왜 ‘독립적 사고’를 못하나” (다른 백년 2017년 6월 27일)

다른 백년

“한국인은 왜 ‘독립적 사고’를 못하나”

2017년 6월 27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한국에 살면서 의아한 점이 하나 있다. 서울에는 훌륭한 고등교육을 받고 하버드와 예일, 스탠포드 등에서 유학한 사람들과 함께 기계공학부터 공공정책, 외교 등에서 뛰어난 지식과 식견을 갖춘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한국은 국제이슈에 관해 자국만의 비전과 시각을 제시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한국 인재들은 북한 및 동아시아 이슈에서 훨씬 뛰어난 통찰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마이클 그린, 프린스턴 대학의 존 이켄베리 등 미국 전문가가 쓴 글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데 온 힘을 쏟는다.

미국 싱크탱크 중 하나인 CSIS에서의 발언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외신’이라는 외피를 쓰고, 국내에 들어와 국내 정치와 외교 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사진은 CSIS에서 열린 북한인권 관련 세미나 장면.

지금 미국 정부가 어떤 정책도 제시할 능력이 못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라도 이 문제는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대통령직을 떼돈 버는 수단으로 인식하는 억만장자 무리와 이들의 충성스런 부하, 국익보다 금융자본을 위해 일하는 전문 공무원과 정치인 사이에서 미국은 정국 마비를 겪고 있다. Read more of this post

“한미정상회담 이후 문재인정부가 할 일” (다른 백년 2017년 7월 4일)

다른 백년

“한미정상회담 이후 문재인정부가 할 일”

2017년 7월 4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아마도 일부 한국 외교관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즐거운 회담을 한 것에 대해 자축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이번 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확인했고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양국이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정상 회담이 심각한 지정학적 갈등으로 이어졌던 트럼프 대통령과 안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회담에 비해 훨씬 더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사실이다.

이번 정상회담의 성적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 쪽이다. 그는 지금 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고, 시민사회에서 탄핵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한국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는 지도자가 트럼프 대통령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Read more of this post

“‘수학’이 다스리는 나라 대한민국” 중앙일보

중앙일보

“‘수학’이 다스리는 나라 대한민국”

2017년 6월 24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나는 우리 학생들이 미래를 걱정하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몹시 가슴 아프다. 나를 안타깝게 만드는 것은 단지 그들이 좋은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만은 아니다. 학생들은 일상의 표면 아래에 감춰진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와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다고 느낀다. 한국 사회는 그들 모두가 인간으로서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일단 숫자로 변환된다. 숫자로 순위를 매긴 다음에야 어떤 일의 가치가 인정받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게 마치 위반하면 안 되는 법칙처럼 돼 버렸다. 한데 랭킹은 우리의 일상적 체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어떤 객관적인 기준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만 한다.

숫자가 다스리는 나라인 한국에서 사는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에 그들이 주변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들이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의 문화와 조직에 어떻게 공헌하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수학적인 방정식을 동원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예컨대 우리는 ‘몇 개의 IT 기기를 팔았는가’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 논문을 몇 편이나 썼는가’ ‘몇 대의 자동차를 점검했는가’와 같은 질문을 한다. Read more of this post

1996년 봄 서울에서

그때 1996년 봄였어요. 생각 해보니까 어제 같아요.

1996-chung-byungsol-yoo-hee-seok.jpg

가장 친한 정병설씨 하고 유희석씨 하고 이대앞 카페에서 문학을 논의 하는 순간였어요. 운연히 잘 남겼어요. 유희석씨는 지금 전남대학교 영문과 정병설씨는 서울대 국문과에 계세요. 지난 18년 같이 만날 기회는 없었어요.

 

 

 

“首尔气候变化协定” 中央日报

中央日报

“首尔气候变化协定”

2017年 6月 13日

贝一明

 

 

 特朗普总统宣布将积极推进美国退出《巴黎气候变化协定》,并撤销奥巴马政府为限制碳排放而准备的项目,这让全世界的人感到非常难过。

但在表示难过之前,我们要对这一问题再深入思考一下。这其实并非切实的灾难,而是我们在国际社会对气候变化的应对中获得了可进行飞跃发展的巨大历史机遇,不是吗?最终,我们能否在没有美国的参与下果断地打开一条路,达成有约束力的协议,发展名义上或实质性的可持续经济呢?

美国政府和企业拼尽全力弱化2015年《巴黎气候变化协定》,使本协定只具有单纯口头协议的意义,不具备实现目标的明确框架,也没对使用技术或政策做出要求。遗憾的是,美国一直执着于石油,对国际社会为应对目前环境危机而推进的几乎所有措施都推诿敷衍。 Read more of this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