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한국어

“문재인과 트럼프와 정치의 죽음” 다른 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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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과 트럼프와 정치의 죽음”

2017년 11월 14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지난주에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 간에 오간 말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두 나라에서 ‘정치’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절감했다.

자신이 소유한 고급 골프코스와 사치스런 요리에 대해 말하는 트럼프의 말에선 한국과 미국의 수백만 저임금 노동자와 실업자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듯했다. 그의 말은 단지 ‘미국 퍼스트’를 넘어서 ‘트럼프 퍼스트’를 떠들어대는 것으로 들렸다.

그런 트럼프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전혀 이의를 달거나 꾸짖지 못했다. 그의 인종주의적인 발언이나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적 정책, 북한에 대한 무분별한 위협에 대해 제동을 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국의 언론들은 모든 미국인들, 그리고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트럼프의 우스꽝스럽고 위험한 정책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도했다.

나는 트럼프와 문재인 두 사람의 발언들을 보면서 ‘정치’는 정확히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되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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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드리는 고언”

2017년 10월 31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파시즘적 성향을 가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방한 직전에 우연히 촛불집회 1주년이 지났다. 정치에는 여전히 수동성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 필자는, 미국인의 한명으로서 1년 전 밤마다 광화문에 모여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던 열정적인 군중들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필자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멀리서 온 고등학생들과 가졌던 토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수세기에 걸쳐 좋은 정부를 추구하며 헌신해왔던 한국인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이제 1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 측면에서 정부의 투명성을 향한 가장 초보적 단계의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박근혜와 측근들의 부패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이 기후변화 및 트럼프 행정부의 무모한 정책으로 인해 야기된 핵전쟁 위협 문제로부터 시민들의 관심과 주의를 분산시키는 수단으로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촛불집회의 내러티브 역시 박대통령과 소수 측근들의 부패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고 보다 큰 문제인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제도적 부패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제도적 부패는 대부분 미국을 추락시키고 있는 타락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여기저기 미국식 군국주의 및 극단적 민영화도 보인다.

진보적대통령 셀카 찍으며 대중적 이미지 키우지만

중요한 정부 직책에 임명된 사려 깊은 이들이 있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도널드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대해 침묵한 채 학생과 셀카 사진을 찍으며 대중적인 이미지를 키우는 ‘진보적’ 대통령이 있다. 한국 대통령은 트럼프가 북한이 국제법에 위반되지 않는 행동과 미국이 수십 년 동안 자행해왔던 것과 같은 죄를 범했다는 구실로 유엔을 북한과의 핵전쟁을 위한 플랫폼으로 이용할 때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바로 미국 대통령이 유엔에서 유엔 헌장을 위반하는 행위에 대하여 할 말이 없었다.

문 대통령의 인기를 살펴본다면 문제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지미 카터 대통령의 경우 정부의 구조적인 부패에 대한 책임에 직면하게 되었고 상업 언론들이 사소한 모든 문제들을 샅샅이 들추어냄에 따라 인기가 급락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힘든 싸움을 피하고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문제는 그대로 둔 채 사소한 문제들로 정권 홍보를 한다. 이제 ‘진보’는 아디다스와 같은 브랜드가 되었으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추구할 소명이 아니다. Read more of this post

“미국의 역주행, 중국의 정주행” 다른 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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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주행, 중국의 정주행”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2017년 10월 19일

 

 

한국인들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인해 한국이 군사 동맹국과 가장 중요한 경제 파트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현 상황에 대한 이런 관점은 정확하지만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실제로 한국은 경제환경과 문명 자체의 미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한 심오한 선택에 직면해 있다.

최근 열린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 장관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회담은 표면적으로는 곧 있을 예정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에 대한 계획을 마련하고 중국이 북한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어떻게 증대시킬 수 있을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Read more of this post

     외국인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의 정치문화 (아시아인스티튜트 보도서)

아시아인스티튜트 보도서  

  

외국인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의 정치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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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수많은 시민과 다양한 시민단체가 참여한 시위가 수 개월간 이어진 끝에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졌다. 세월호 참사 수사가 제대로 시작됐으며,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비리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이 기소됐고, 가장 투명했던 선거 중 하나로 기록될 대선을 통해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했다.

분명히 해두자. 이 모든 변화는 깨끗한 나라를 향한 국민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암암리에 행해진 비밀 거래와 부패한 정치 관행이 밝혀진 과정은 충격적이었지만, 고무적이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 국민이 정부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고 한탄하는 동안, 한국은 국민의 힘으로 거대한 변화와 개혁이 가능함을 몸소 보여줬다. 가요나 드라마를 비롯한 한류 콘텐트뿐 아니라 정치 운동과 민주주의의 활력을 통해서도 타국에 귀감이 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나 아베 신조, 블라디미르 푸틴 등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주어진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부러워할 것이 분명하다. 한국은 아직 진짜 ‘선진국’이 아니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서 새로운 위상을 정립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을 비롯한 소위 ‘선진국’ 다수는 무기력에 빠졌다. 무기력은 민주주의를 산 채로 갉아 먹고 공들여 세운 제도를 부패시키고 있다. 한국의 제도는 아직 미성숙할 수 있지만, 변화를 위한 의지가 감지된다. 실질적 변화를 막으려 애쓰는 기업집단의 영향력을 벗어나 정책 구상 및 이행을 추진하는 다양한 주체를 규합하려는 의지도 분명 존재한다.

이 기회를 잡는다면, 한국은 다시 한 번 변화를 이루고 정당을 혁신할 뿐 아니라 정부와 기업 등의 지배구조를 혁신하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대기업이 만든 특색 없는 제품을 소비하고 엔터테인먼트 콘텐트나 미디어에 마음을 뺏기고 아이돌과 연예인에 열광하는데 삶의 에너지를 쏟기 보다 서로를 도우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참여사회’를 만드는데 노력을 쏟을 수 있다. 한국은 사회가 나아갈 길을 알려주며 다른 국가의 귀감이 될 수 있다. 중국에서는 한국의 이번 탄핵 사태가 유례없을 정도로 자세히 보도했다. 중국 정부가 한국의 정치개혁을 참고할 만한 모델로 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시아와 세계 각국 또한 한국을 주시하고 있다.

세계 무대에서 한국이 새로운 역할을 부여 받았으므로 한국의 신(新)민주주의 운동에 참여한 시민 또한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적폐 청산에만 몰두할 게 아니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고 정치인이 책임을 완수하게 만드는 동시에 지속가능한 환경을 구축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미래를 제시할 수 있다.

의식의 전환을 이끌기 위해서는 촛불혁명 참가자 모두가 강력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 한국에서 놀라운 정치혁명이 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평범한 시민과 지식인이 힘을 합쳐 훌륭한 지배구조를 만들기 위해 힘썼던 전통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대왕 집권기에도 대학∙중용은 학생을 격려하기 위한 이상적 철학에 그치지 않고 국민의 삶을 돌보는 정부를 위한 주요 원칙으로 다루어졌다. 유학 고전의 가르침을 중국인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여 그 안에 숨은 민주적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17세기에는 서얼제도의 부당함에 맞선 싸움이 있었고, 18세기에는 영조의 실책에 맞선 지성인의 저항이 있었다. 19세기에는 소수 외척의 권력 독점을 막으려는 싸움이 있었고, 20세기에는 일제 식민정부와 경제 착취에 맞선 운동이 있었다. 1950, 60, 70년대에도 수많은 사람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며 싸움을 계속했다. 덕분에 1980년대 학생들은 민주화 운동을 이끌 수 있었다.

한국의 민주적 전통은 남다르다. 영감을 받을 수 있지만, 동시에 한국이 넘어야 할 큰 산도 눈 똑바로 뜨고 제대로 바라봐야 한다. 막연히 잘 될 거라 생각하지 말고, 청년층이 필요한 이슈를 이해하고 앞으로 할 일을 정하도록 돕기 위한 장기적 노력을 계획에 포함시켜야 한다. 수십 년은 걸릴 것이다. 의욕을 꺾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극복할 방법에 대해 제안을 하고 싶다.

비슷한 노력이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싸움은 그 결이 다르다. 세종대왕 때부터 1980년대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한 시위까지, 모든 노력은 결국 한국의 변혁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번 싸움은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우리가 얼굴을 보지도 못한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혁명이 전세계 시민에게 변화를 향한 새로운 열망을 안겨주었듯이, 지금 한국의 변화도 그만큼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우리의 모든 행동은 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 함께,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는 인간 문명의 세계적 진화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의무가 있으며, 이것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새로운 깊이와 중요성을 더한다. 한국과 세계를 위한 변화는 죄인을 감옥에 넣고 특정 공약을 내세운 정치인을 선출한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다. 그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서로를 대하는 태도, 사회에 임하는 태도를 변화시켜야 한다. 서로를 착취하고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게 만드는 건강치 못한 패턴을 우리의 행동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Read more of this post

동아일보 “추석의 위기”

동아일보

“추석의 위기”

2017년 10월 3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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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추석을 처음 경험한 해는 1년간의 한국어 연수를 위해 한국에 온 1995년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을 하며 정착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이번 추석은 내가 꼭 10번째 맞는 추석이다. 10년간 처가에서 맞는 추석은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아마 다른 가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변화를 감히 위기라 부를 수도 있겠다. 추석 명절이 다음 세대에도 의미를 가질지, 아니 존속 자체가 가능할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장모님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추석 차례상에 올릴 과일과 음식을 준비하셨다. 차례상은 ‘주자가례’를 한국식으로 해석한 원칙에 따라 정성스레 차려졌다. 차례에는 가족들이 필사적으로 참석해 함께 조상을 기리고 존경을 표했다. 우리보다 앞선 시간을 살다 가고,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현재 우리의 삶에도 영향을 주는 조상의 존재를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장모님은 꼼꼼하게 깎은 배와 밤, 곶감과 어포, 떡을 올린 제기를 상에 올리고 초에 불을 붙였다. 차례상은 음식을 소중히 아끼는 마음과 과거에 대한 경건한 기억이 조화롭게 합쳐진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다른 가족과 함께 차례상 앞에 앉아 향을 피워 돌아가신 조상에게 바쳤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유아독존의 개인이 아니라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든 전통의 일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소비문화가 맹위를 떨치면서 과거를 경건히 기억하며 의식의 범위를 확장하는 시간은 사라졌다. 추석은 상업적 마케팅 수단으로 퇴색해 갔다. 이제 장모님은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아침 일찍 간략한 차례를 먼저 지내신다. 추석 문화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던 조상에 대한 대화와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경건한 묵념은 사라졌다.

이제 추석은 소비를 만끽하는 명절이다. 먹고 또 먹는 시간이 반복된다. 아이들은 TV를 보고, 어른들은 돌아서면 잊을 만한 소문이나 잡담을 생각나는 대로 나눈다. 우리를 만들어준 과거를 되짚지 않고 차례상에 올릴 음식, 심지어 서로에 대해서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조상을 기리고 감사함을 느끼는 마음은 자취를 감췄다.

요즘에는 추석 때 아예 오지 않는 가족도 있다. 한때는 해외에 있는 가족까지도 반드시 참여해 ‘한 가족’임을 느끼는 중요한 명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친구와의 약속, 심지어 학교 과제를 이유로 내세워 추석 때 아예 오지 않거나 잠깐 왔다 가곤 한다.

추석이란 명절 자체가 즉각적 만족과 순간적 소유를 만끽하는 자리로 변질됐다. 추석이 가진 본래 의미는 반대로 뒤집혔다. 우리보다 앞선 시간을 살아간 사람들, 그들이 이룬 가족에서 이어진 가닥들이 합쳐져 지금의 우리와 그 경험을 만들었음을, 우리가 그저 홀로 태어난 사람이 아님을 기억하는 자리는 더 이상 없다.

나는 추석 명절의 차례 의식을 좋아했다. 먼저 살다 간 사람들과 우리, 우리와 가족의 관계를 군더더기나 꾸밈 없이 확인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일상의 가장 단순한 활동도 감사히 여기는 시간은 삶을 새롭게 환기시키는 중요한 쉼표가 되어 줬다.

추석을 되살리고 싶다면, 추석의 고유한 가치를 되새겨야 한다. 소비할 것들로 가득 채운 차례상보다 의미를 살린 간략한 행동이 정신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짐을 깨달아야 한다.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아이들이 조상의 존재를 실제로 느끼고, 자신이 먼 과거로부터 이어진 위대한 존재의 사슬에 닿아 있음을 깨닫게 도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추석에 자연의 순환을 느끼는 시간이 다시 생겼으면 좋겠다. 농사의 수확을 축하하는 자리이니, 산에서 자연을 즐기거나 농장에서 곡물과 채소를 구하며 세상의 섬세한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느끼는 시간을 가져보자.

“스마트폰 개발보다 더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한국” 다른 백년

다른 백년

“스마트폰 개발보다 더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한국”

2017년 9월 18일

페스트라이쉬 임마누엘

 

 

지난 한달 동안 핵무기 이야기만 듣다 보니까 핵무기만이 유일한 위험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오지는 않지만 훨씬 더 위험한 문제가 동시에 우리 눈앞에 다가와 있다.

초여름, 유례없는 가뭄으로 농사가 큰 피해를 입고 저수지는 바짝 말랐다는 기사가 신문을 뒤덮었다. 기상청에 따르면 5월 총 강수량은 161.1밀리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1973년 측정을 시작한 이후 두 번째로 낮은 기록이다.

그러나 가뭄과 기후변화를 연결 짓는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동북아시아 사막화 현상과 관계있다는 언급 또한 없었다. 실지로 아시아 지역에서는 사막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전망은 좋지 않다. Read more of this post

중앙일보 서평

중앙일보

서평

더 큰 대한민국

손민호

2017년 8월 25일

한국인만 몰랐던 

더 큰 대한민국이 만열 지음레드우드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한국인보다 한국에 더 자부심을 느끼는 외국인이다. 여러 저작을 통해 한국 문화의 가치와 잠재력을 역설한 그가 이번에는 한국인 이름 ‘이만열’로 한국 사회를 통찰하는 책을 썼다. 『한국인만 몰랐던 더 큰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에서 3년 전에 펴낸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의 연장선이자 확장판이라는 책의 의의가 가늠된다.

 책에서 놀랐던 대목은 이 교수와 한국 사회의 거리다. 이 교수는 외국인의 시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우리 사회 깊숙이에 들어와 우리의 내밀한 곳을 후벼 판다. 이를테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이들이 부당하게 갈취한 금액은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에 쏟아부은 22조 원이나 자원 외교에 낭비한 수십조 원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23쪽)’와 같은 진단은, 숨기고 싶은 상처를 들키고 만 것처럼 창피하고 아프다.

이 교수의 남다른 시선은 예리하고 깊이 있는 분석이 아니라 이 교수의 자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교수는 기꺼이 관찰자의 자리를 이탈해 내부자의 자리로 들어온다. ‘우리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정보에 기반한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63쪽)’며 한국적 저널리즘의 수립을 주장할 때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는 한국에 정착한 지 10년째인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 여성과 가정을 꾸린 이만열이라는 한국 사회의 내부자다.
그렇다고 이 교수가 한국을 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방에 텀블러를 넣고 다니는 이 교수에게 일회용품 낭비를 부추기는 한국의 카페 문화는 끔찍하다. 성형수술을 한국의 주요 관광상품으로 육성하자는 움직임은 심오한 정신세계를 구축한 한국 문화의 뿌리를 흔드는 일이라고 꾸짖기도 한다. 읽고 보니 싫은 소리투성이다. 그래도 기분 나쁘지는 않다.

“문재인, 오바마처럼 되지 않을까” 다른 백년

다른 백년

“문재인, 오바마처럼 되지 않을까”

2017년 8월 21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한국 신문에는 독자가 별 관심이 없는 시시콜콜한 내용이 가득하다. 최근 UN에서 북한을 제재하기 위해 각 국의 외교관과 정치가의 일거수 일투족을 중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어느 누구도 그런 제재가 북한의 핵 개발을 멈추게 할 거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한국 언론은 독자들에게 나라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를 알리는 기능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환상의 공간’이 된 것 같다. 대신 오해와 혼란만을 야기하는 것 같다.

이러한 언론의 타락은 사람들을 장님으로 만들고, 북핵보다 더 위험한 위협이 되고 있다. 보수매체든, 진보매체든 마찬가지이다.

북한에 대한 UN의 제재를 다룬 신문들은 국제사회의 이면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는다. 동아시아에는 미사일 실험과 소요에 관한 협약이 없기 때문에 국제법상 미사일 발사는 불법이 아니라는 사실은 지적되지 않는다. 또 북핵을 핑계로 중국, 미국, 일본, 한국이 핵무기 경쟁을 할 위험성을 지적하는 신문도 좀처럼 볼 수 없다.

결국 가장 중요한 뉴스가 빠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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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너지 패러다임 전쟁” 경향신문  

경향신문

2017년 8월 8일

“신에너지 패러다임 전쟁”

임마누에 페스트라이쉬

 

중국 정부가 베이징에서 화석연료 택시 사용을 단계적으로 중단하고 전기차를 대대적으로 도입한다는 정책 발표를 했다. 그러나 이 뉴스는 북한 핵무기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에 묻히고 말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행정동 앞에 수년간 쓸쓸하게 서 있던 전기차 1대가 생각난다. 한국은 아직도 전기차 전면 도입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관계를 걱정하는 동안, 중국은 2020년까지 재생가능 에너지 3600억달러 투자를 공표하고, 태양에너지·풍력 발전 및 개발산업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달려가는 중이다.

한국에서는 스마트폰 생산과 자동차 수출만 늘리면 경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 경제·기술 분야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그야말로 기념비적이다. 한국이 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안이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미디어 또한 솔직하지 못하며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일단 역사적 시각에서 지금의 경제 전환을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대영제국에 무역대국의 자리를 물려주기 전만 해도 경제 규모나 수준에서 가장 앞섰던 국가는 중국이었다. 중국의 번영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주효했던 요소는 대규모 식량의 효율적 생산이었다. 1830년대 이전만 해도 각국이 활용 가능했던 에너지는 사람과 동물의 육체노동뿐이었다. 다시 말해, 광합성으로 전환된 태양에너지는 식량의 농업적 생산을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었다.

중국은 장기적 농업정책에서도 크게 앞서 있었다. 전국적 수리(水理) 관개(灌漑) 제도 확충과 노련한 운용 정책은 그중에서도 최고였다. 그러나 19세기 영국(을 선두로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 석탄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경제가 시작됐다. 석탄은 목재나 육체노동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제공했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을 가동시켰다. 중국의 에너지 시스템은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석탄으로 얻은 화력이 군수산업에 도입되면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은 아편전쟁에서 능욕을 당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석탄경제 또한 영원할 수는 없었다. 20세기 초반 석탄보다 훨씬 효율적인 또 다른 화석연료, 석유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Read more of this post

“수학이 다스리는 나라 대한민국” (중앙일보2017년 6월 24일)

중앙일보

“수학이 다스리는 나라 대한민국”

2017년 6월 24일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나는 우리 학생들이 미래를 걱정하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몹시 가슴 아프다. 나를 안타깝게 만드는 것은 단지 그들이 좋은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만은 아니다. 학생들은 일상의 표면 아래에 감춰진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와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다고 느낀다. 한국 사회는 그들 모두가 인간으로서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일단 숫자로 변환된다. 숫자로 순위를 매긴 다음에야 어떤 일의 가치가 인정받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게 마치 위반하면 안 되는 법칙처럼 돼 버렸다. 한데 랭킹은 우리의 일상적 체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어떤 객관적인 기준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만 한다.

숫자가 다스리는 나라인 한국에서 사는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에 그들이 주변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들이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의 문화와 조직에 어떻게 공헌하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수학적인 방정식을 동원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예컨대 우리는 ‘몇 개의 IT 기기를 팔았는가’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 논문을 몇 편이나 썼는가’ ‘몇 대의 자동차를 점검했는가’와 같은 질문을 한다.

수학은 한국에서 가치를 매기는 최종적 결정권자가 됐다. 그 어떤 공헌도 양적으로 가늠할 수 없으면 인정되지 않는다. 나는 우리 학생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한국 사회에 내재돼 있는 끔찍한 ‘폭력’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지극히 복합적인 인간의 체험, 식구들이나 공동체 혹은 자연 세계와 ‘나’라는 개인 사이에 벌어지는 본질적으로 미묘하면서도 다차원적인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랭킹으로 단순화돼 표현된다. 랭킹이라는 단일한 숫자는 어떤 개인이나 조직, 심지어 나라 전체의 가치를 표시한다.

이처럼 인위적인 방식으로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가치를 수리적으로 바꿔놓으려는 욕구의 원천은 무엇일까. 한국인들이 다른 한국인을 판단하도록 내버려두면, 필연적으로 부패가 끼어든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패를 차단하려면 수학적인 평가라는 보다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체험에 대한 이러한 2차원적인 접근법은 인간 체험을 ‘평준화’시켜 버린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공허함이 남는다.

교수로서 나는 교수진에 대한 평가가 좁은 범위의 학술지에 몇 개의 논문을 냈느냐로 평가된다는 사실이 놀랍다. 교수들이 쓰는 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전혀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이 멘토•동료•시민•작가 혹은 철학자로서 어떤 일을 하는지는 관심 밖이다. 몇 편의 학술지 논문을 썼는지는 컴퓨터로 쉽게 셀 수 있다. 하지만 글을 포함해 어떤 교수가 하는 일들의 중요성과 의미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일들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들뿐이다.

우리 학생들이 처한 상황은 훨씬 나쁘다. 그들의 복합적인 개인 체험은 일자리에 지원하는 과정에서 ‘스펙(specs)’이라는 묶음으로 변환된다. 마늘이 마늘 으깨는 기구에 겪게 될 운명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다. 비극은 단지 학생들에게 돌아갈 일자리 수가 충분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젊은이들을 저마다의 존재 자체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비극이다. 그들이 척도에서 차지하는 숫자를 묻는 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당신에게는 어떤 것들이 근본적인 가치입니까’를 물어야 한다.

사람의 가치를 이해하는 복합적이고 뉘앙스가 있는 방식을 찾아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사람을 화폐 단위로 정의하지 않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모든 사람의 체험과 공헌을 온전히 평가하려면 사람들 사이에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인식론적 질서에서 꼭대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경제다. 경제는 그저 국내총생산(GDP)이나 이자율이나 수출 같은 숫자로 정의될 뿐이다. 그다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기술이다. 하지만 기술의 중요성을 보여줄 때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매출이나 이윤이다. 역시 숫자다. 기술이 사회에 실제로 미치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은 중시되지 않는다.

문화는 ‘질서 더미’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문화는 개인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활동이나 주말에 긴장을 푸는 휴식 정도로 인식된다. 문화는 우리를 궁극적으로 정의한다. 문화는 우리의 가치를 설정하며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가 통계에 집중하면서 미묘하거나 섬세하거나 어떤 때에는 모호하기까지 한 문화의 본질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더 빨리 갈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진로의 대한 통제력은 상실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왜 거기로 가는지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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